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빛낸 사람-공군 에어쇼 성사시킨 정표수 향우(하)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빛낸 사람-공군 에어쇼 성사시킨 정표수 향우(하)
by 운영자 2013.04.10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 고향과 후배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어”
그는 1956년 순천시 서면 죽평리에서 태어나 동산초(40회)와 순천중학교(31회), 순천고등학교(24회)를 거쳐 1979년 공군사관학교(27기)를 졸업했다. 이후 창공을 누비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화려한 비행을 하게 된다.
비행훈련을 1등으로 수료한 그는 1991년 공군 사격대회에서 최우수 사격수 즉 탑건(TOP GUN)이 되고 이듬해에는 다시 공군 최우수 조종사에 뽑혔으며, 비행대대장 시절에는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2번에 걸친 미국 유학(미 공군대학, 미 국방대학교 졸업)을 통해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우며 국방안보분야의 정책 브레인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5년 동기 중 1차로 공군 준장에 진급했다. 이후 참모총장 비서실장, 합참 화력처장, 충주 전투비행단장을 거치며 명확한 판단과 깔끔한 문제 해결로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2008년에는 소장으로 1차에 진급했다.
하지만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소장을 달던 해 MB정부가 들어서며, 이유없이 한직으로 밀려났고 능력과 인품은 인정받았지만 진급도 실패했다. 미련없이 그는 올해 1월 명예로운 전역을 택했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먼저 내가 부족한 탓이며, 소신껏 살아온 지난 세월에 자긍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을 고향의 발전과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도덕경’의 ‘知足不辱(지족불욕)이요 知止不殆(지지불태)’라는 말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심경을 밝혔다.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오늘을 있게 한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그는 1968년 봄을 떠올린다. 당시 그는 지역 명문 순천중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진학을 포기하고 모내기를 하는 논에서 못줄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사 윤양현 선생님이 강력하게 공부를 권유했고, 다시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며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숱한 어려움이 찾아왔지만 이 때의 경험은 고비를 넘기는 밑거름이 됐다.
정 교수는 요즘 한 달에 2번 정도 순천을 찾는다. 서면 죽평리에 사는 노모(100)를 돌보기 위함이다. 노모는 경로당을 자주 찾는데, 그도 올 때마다 소탈하게 막걸리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마을 경로당을 찾는다. 이웃 어르신들도 내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고향을 찾으면 항상 선친의 묘소도 찾아보는데 이유가 있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사후에도 살펴보고 돌보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그는 현역 시절, 군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매년 명절이면 어김없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았다. 이런 그를 보고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아빠는 효자’라는 말을 했다.
[교차로신문사/ 지정운 기자 zzartsosa@hanmail.net]
그는 1956년 순천시 서면 죽평리에서 태어나 동산초(40회)와 순천중학교(31회), 순천고등학교(24회)를 거쳐 1979년 공군사관학교(27기)를 졸업했다. 이후 창공을 누비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화려한 비행을 하게 된다.
비행훈련을 1등으로 수료한 그는 1991년 공군 사격대회에서 최우수 사격수 즉 탑건(TOP GUN)이 되고 이듬해에는 다시 공군 최우수 조종사에 뽑혔으며, 비행대대장 시절에는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2번에 걸친 미국 유학(미 공군대학, 미 국방대학교 졸업)을 통해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우며 국방안보분야의 정책 브레인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5년 동기 중 1차로 공군 준장에 진급했다. 이후 참모총장 비서실장, 합참 화력처장, 충주 전투비행단장을 거치며 명확한 판단과 깔끔한 문제 해결로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2008년에는 소장으로 1차에 진급했다.
하지만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소장을 달던 해 MB정부가 들어서며, 이유없이 한직으로 밀려났고 능력과 인품은 인정받았지만 진급도 실패했다. 미련없이 그는 올해 1월 명예로운 전역을 택했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먼저 내가 부족한 탓이며, 소신껏 살아온 지난 세월에 자긍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을 고향의 발전과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도덕경’의 ‘知足不辱(지족불욕)이요 知止不殆(지지불태)’라는 말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심경을 밝혔다.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오늘을 있게 한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그는 1968년 봄을 떠올린다. 당시 그는 지역 명문 순천중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진학을 포기하고 모내기를 하는 논에서 못줄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사 윤양현 선생님이 강력하게 공부를 권유했고, 다시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며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숱한 어려움이 찾아왔지만 이 때의 경험은 고비를 넘기는 밑거름이 됐다.
정 교수는 요즘 한 달에 2번 정도 순천을 찾는다. 서면 죽평리에 사는 노모(100)를 돌보기 위함이다. 노모는 경로당을 자주 찾는데, 그도 올 때마다 소탈하게 막걸리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마을 경로당을 찾는다. 이웃 어르신들도 내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고향을 찾으면 항상 선친의 묘소도 찾아보는데 이유가 있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사후에도 살펴보고 돌보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그는 현역 시절, 군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매년 명절이면 어김없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았다. 이런 그를 보고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아빠는 효자’라는 말을 했다.
[교차로신문사/ 지정운 기자 zzartsos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