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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서 문화를 만나다- 문화예술인 릴레이 인터뷰> ⑨

<교차로에서 문화를 만나다- 문화예술인 릴레이 인터뷰> ⑨

by 운영자 2014.11.27

‘소리로 전통 예맥 잇는다’판소리 송순섭 명창
오솔길의 그윽한 정취와 어우러진 맑은 물소리, 이따금씩 끼어드는 새소리. 여기에 북 장단에 맞춰 호쾌한 맛을 내는 소리꾼의 소리가 더해지니, 눈앞의 풍경은 어느 순간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동편제 ‘적벽가’ 예능보유자인 송순섭 명창(79·사진)을 찾아, 순천시 조비길 소재 ‘운산판소리전수관’으로 들어서자 이처럼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스승님의 고향 순천에서 소리의 맥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2005년, 순천에 전수관을 열고 정착했어. 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접근성은 낮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 몰라.”

전남 고흥 출신인 송순섭 명창은 부산, 광주를 거쳐 스승인 박봉술 선생과 박 선생의 스승 송만갑 선생의 고향 순천에 정착해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다음 전수자도 순천 출신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애가 타. 전국에서 소리를 배우겠다고 사람들은 많이 오는데 정작 순천 사람은 없어. 내 나이가 여든이야. 내가 떠나고 나면 동편제 적벽가 소리 맥이 어찌 될지 잠이 안와.”

판소리(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명창 중 남자 인간문화재는 동편제의 송순섭 명창이 유일하다. 그 사실은 자부심이면서도 맥이 제대로 이어질지 불안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동편제는 부드럽고 연한 서편제와는 다르게 투박하면서도 힘이 느껴지지.”

송 명창은 지난 2002년, ‘적벽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적벽가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로,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가운데 관우가 화용도에서 포위된 조조를 죽이지 않고 너그러이 길을 터주어 달아나게 한 적벽대전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그의 소리를 배우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제자가 된 소녀 ‘이소연’은 어느덧, 국립창극단원이 되어 전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자와 관련된 신문 기사들을 일일이 보여주며 설명하는 송 명창의 얼굴에서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묻어난다.

그가 제자와의 수업에서 불호령을 내리는 순간은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않았을 때다. 판소리는 가사의 뜻과 음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된 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사성어 등이 많은 판소리는 현대인들이 한 번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화 되고 있는 흐름은 분명 잘못됐다고 송 명창은 꼬집는다.

“한자를 중국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우리는 5000년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여.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역사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 아녀?”

이런 생각에 송 명창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서울의 (사)한국판소리문학회에서 저명한 한학 교수를 초청, 일반인과 소리꾼들을 대상으로 고사성어 수업을 열고 있다.

“물론 어렵지. 그런데 원래가 힘든 길이야.”

돈 한 푼 없던 시절, 공대일 선생의 배려로 배우게 된 소리는 그에게 너무도 재미있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약장사를 하다가도 소리판으로 되돌아간 이유는 순전히 그것이었다고.

“자식들한테는 항상 미안하지. 돈이 없어 제대로 못 가르친 거. 그게 한이야.”

힘든 시기를 넘기고 전성기를 맞이한 송 명창은 선열들의 민족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국난극복의 역사 인물을 창극화하면서 ‘애국 명창’으로도 유명해졌다.

동래부사 송상헌, 안중근 장군, 도산 안창호 선생, 유관순 열사 등 창극으로 올린 인물만 줄을 세워도 부족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제자 양성에 힘쓰겠다”고 답하는 송 명창.

하지만 그 순간에도 말소리, 몸짓 등 소리꾼 특유의 멋과 맛은 그가 천상 소리꾼임을 드러낸다. 영원한 현역, 송순섭 명창의 소리판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교차로신문사/ 이보람 기자 shr55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