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50여년 대금 제작·연주 조용현씨
인터뷰 》50여년 대금 제작·연주 조용현씨
by 운영자 2015.06.10
“대금처럼 ‘창시’가 없으니 가능한 일이제”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들은 대금 소리 ‘인연’
시행착오 수천 번 … 혼자 만들고 불며 ‘터득’
대금 연주, 아쟁·대금·가야금 작품 전시 공간 ‘꿈’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들은 대금 소리 ‘인연’
시행착오 수천 번 … 혼자 만들고 불며 ‘터득’
대금 연주, 아쟁·대금·가야금 작품 전시 공간 ‘꿈’
음력 5월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가 있다. 이 무렵, 갈대 속에서 촉촉하게 물을 머금은 얇은 갈대 속 때문이다.단오를 기점으로 갈대 속은 대금의 청공을 덮는 청으로 마침맞게 자란다. 좋은 대금을 만들기 위해 이정도의 기다림은 예삿일.
“나도 대금처럼 ‘창시’가 없잖아. 그러니까 50년 넘게 했지.”
대금 제작가 조용현(64)씨. 해가 지는지 달이 지는지도 모르게 앞뒤 재지 않고 대금에 빠져 지낸 세월이 52년을 지나고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데, 농방 앞에서 어떤 노인이 대나무를 깎고 있더라고. 뭔가 싶어 한참을 보고 있으니 노인이 또 그걸 불어. 그런데 그 소리가 아주 환장을 하겠더라고. 그 길로 가방 던져놓고 대나무를 베러 갔지.”
고흥 동강 ‘촌놈’이던 그는 그렇게 대금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첫사랑과 50년을 넘게 살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대금인지도 몰랐다. 노인이 만든 ‘그것’을 똑같이 만들어 불고 싶어 동네의 길고 짧고 굵고 가늘고 반듯하고 휘어진 대나무란 대나무를 다 잘라왔다.
자른 대나무는 쇠꼬챙이에 불을 달궈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크게 내기도 하고 작게도 내보고, 5개도 뚫었다 6개도 뚫었다 하며 소리의 차이를 들었다.
“몰랐으니까. 고흥 그 시골에 요즘처럼 대금을 가르쳐주는 데가 있나, 컴퓨터가 있나. 그냥 혼자 해보는 거지.”
대부분의 것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망치로 깨부쉈다. 미련이 남으면 제대로 된 것을 만들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 번의 실패 끝, 30여 년이 지나자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 이 소리 됐다’ 할 때까지 꼬박 30년이 걸렸어. 그간의 어려움이이야 말로는 다 못하지.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었으니까.”
30여 년 세월 동안 늘 팍팍했던 살림살이를 위해 다른 일을 해볼까도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의 외도는 딱 한번뿐. 두 아들의 대학 뒷바라지를 위해 막노동을 한 4년을 빼고는 모두 대금을 만들고 부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는 대금 외에도 해금, 가야금, 단소, 피리, 아쟁 등 우리 악기를 제작한다. ‘돈 없으니 만들어 쓰자’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만들어 쓰면서 저마다의 악기에 대해 더 잘 알게 됐고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됐다.
좋은 대금을 만드는 것은 좋은 대나무를 얻는 일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10월부터 2월까지 살을 에는 추위에도 그는 광양, 고흥, 장흥의 산들을 누비며 기형 대나무인 쌍골죽(雙骨竹)을 찾아 나선다.
모든 대나무에는 마디와 마디 사이에 골이 하나 있는데, 쌍골죽은 기이하게 두 개의 골이 생긴다. 또 이것은 일정한 굵기가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속을 채워, 좋은 악기를 위한 재료가 된다.
3년에 하나 얻을까 말까 한 귀한 쌍골죽이 단단한 대금으로 태어나는 데는 그늘에 말려 물기를 빼고, 휘어지려는 대를 불로 구워 반듯하게 모양을 잡기까지 1년이 꼬박 걸린다.
이후 미끈하게 뻗은 쌍골죽에 취구와 청공을 내고 10개의 구멍을 뚫는다.
1000가닥의 명주실을 꼬아 만든 실로 대금이 뒤틀리거나 깨지지 않게 동여매고, 사슴의 뿔로 만든 녹각 풀을 이용해 갈대 속을 청공에 붙이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대금 한 자루가 완성된다.
그의 대금은 숨을 쉰다. 취구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의 숨과 대나무와 갈대 속, 사슴 뿔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또 섞이며 ‘자연’의 소리를 낸다.
일평생을 온몸으로 대금을 만들어 온 조용현씨는 자신의 세월을 증명하는 대금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다. 그리고 스스로 터득한 대금 연주를 남기는 것.
그는 이를 위해 오늘도 대금 자루를 곁에 둔다. 그리고 겨울을 기다린다.
타고난 재주에 은근과 끈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완성된 조용현씨의 대금 자루는 ‘명품’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나도 대금처럼 ‘창시’가 없잖아. 그러니까 50년 넘게 했지.”
대금 제작가 조용현(64)씨. 해가 지는지 달이 지는지도 모르게 앞뒤 재지 않고 대금에 빠져 지낸 세월이 52년을 지나고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데, 농방 앞에서 어떤 노인이 대나무를 깎고 있더라고. 뭔가 싶어 한참을 보고 있으니 노인이 또 그걸 불어. 그런데 그 소리가 아주 환장을 하겠더라고. 그 길로 가방 던져놓고 대나무를 베러 갔지.”
고흥 동강 ‘촌놈’이던 그는 그렇게 대금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첫사랑과 50년을 넘게 살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대금인지도 몰랐다. 노인이 만든 ‘그것’을 똑같이 만들어 불고 싶어 동네의 길고 짧고 굵고 가늘고 반듯하고 휘어진 대나무란 대나무를 다 잘라왔다.
자른 대나무는 쇠꼬챙이에 불을 달궈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크게 내기도 하고 작게도 내보고, 5개도 뚫었다 6개도 뚫었다 하며 소리의 차이를 들었다.
“몰랐으니까. 고흥 그 시골에 요즘처럼 대금을 가르쳐주는 데가 있나, 컴퓨터가 있나. 그냥 혼자 해보는 거지.”
대부분의 것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망치로 깨부쉈다. 미련이 남으면 제대로 된 것을 만들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 번의 실패 끝, 30여 년이 지나자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 이 소리 됐다’ 할 때까지 꼬박 30년이 걸렸어. 그간의 어려움이이야 말로는 다 못하지.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었으니까.”
30여 년 세월 동안 늘 팍팍했던 살림살이를 위해 다른 일을 해볼까도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의 외도는 딱 한번뿐. 두 아들의 대학 뒷바라지를 위해 막노동을 한 4년을 빼고는 모두 대금을 만들고 부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는 대금 외에도 해금, 가야금, 단소, 피리, 아쟁 등 우리 악기를 제작한다. ‘돈 없으니 만들어 쓰자’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만들어 쓰면서 저마다의 악기에 대해 더 잘 알게 됐고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됐다.
좋은 대금을 만드는 것은 좋은 대나무를 얻는 일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10월부터 2월까지 살을 에는 추위에도 그는 광양, 고흥, 장흥의 산들을 누비며 기형 대나무인 쌍골죽(雙骨竹)을 찾아 나선다.
모든 대나무에는 마디와 마디 사이에 골이 하나 있는데, 쌍골죽은 기이하게 두 개의 골이 생긴다. 또 이것은 일정한 굵기가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속을 채워, 좋은 악기를 위한 재료가 된다.
3년에 하나 얻을까 말까 한 귀한 쌍골죽이 단단한 대금으로 태어나는 데는 그늘에 말려 물기를 빼고, 휘어지려는 대를 불로 구워 반듯하게 모양을 잡기까지 1년이 꼬박 걸린다.
이후 미끈하게 뻗은 쌍골죽에 취구와 청공을 내고 10개의 구멍을 뚫는다.
1000가닥의 명주실을 꼬아 만든 실로 대금이 뒤틀리거나 깨지지 않게 동여매고, 사슴의 뿔로 만든 녹각 풀을 이용해 갈대 속을 청공에 붙이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대금 한 자루가 완성된다.
그의 대금은 숨을 쉰다. 취구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의 숨과 대나무와 갈대 속, 사슴 뿔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또 섞이며 ‘자연’의 소리를 낸다.
일평생을 온몸으로 대금을 만들어 온 조용현씨는 자신의 세월을 증명하는 대금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다. 그리고 스스로 터득한 대금 연주를 남기는 것.
그는 이를 위해 오늘도 대금 자루를 곁에 둔다. 그리고 겨울을 기다린다.
타고난 재주에 은근과 끈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완성된 조용현씨의 대금 자루는 ‘명품’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