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노래로 희망 찾는 무명가수 정승미 씨
<인터뷰> 노래로 희망 찾는 무명가수 정승미 씨
by 운영자 2013.09.23
“힐링ㆍ치유의 노래로 모든 이에게 봉사할 것”
20여년 평범한 주부에서 다시 가수활동 시작
20여년 평범한 주부에서 다시 가수활동 시작
무명가수 정승미(49·사진)씨가 지난 여름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최근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반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알리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승미 씨를 만나 가수활동을 재개한 이유와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촉망받는 밤무대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결혼과 함께 화려한 무대를 떠나야 했던 아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정 씨는 노래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보성이 고향이다. 학창시절 그는 노래의 대명사였다. 중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는 항상 그의 독차지였다.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에 20대 초반, 가수의 꿈을 안고 찾아간 곳은 수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봉조 씨와 절친한 친구였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선영 씨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스승은 정 씨에게 발성연습부터 시켰는데, 매일 새벽 5~6시 수원 팔달산에 올라 6개월 동안 혹독한 연습을 해야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스승에게 인정받은 그는 22살이 되던 해 6개월간의 군부대 위문공연을 첫 무대로 갖게 됐다.
이후 각지의 밤무대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27살이 되던 해 인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당시 일본을 다녀와 개인 스폰서까지 구했지만, 결혼과 가수생활을 놓고 깊은 고민을 해야했던 것. 노래가 좋았지만 가수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던 그는 결국 평범한 주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가수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스승 선영 씨가 폐암으로 작고한 것도 결정타가 됐다.
결혼 후에도 그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고, 이를 증명하듯 97년 보성다향제 기간동안 열린 전국노래자랑에서는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수 생활을 시작하진 못했다.
이런 세월이 20여 년 흘렀다. 두 아들은 커서 철이 들었고, 묻어두었던 젊은 시절의 아쉬움도 새록새록 커져만 갔다.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에만 매달리며 잊었던 무대 조명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하기로 하고 용기를 냈다.
새로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 뿐이다. 이 때문에 순천을 중심으로 인근 시군은 물론 멀리 수원까지 자신을 원하는 곳은 달려간다.
정 씨는 “언제든 어디서든 불러만 주신다면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며 “이제는 원숙한 인생을 담아 노래를 통해 치유와 힐링을 이뤄보고 싶다”고 말한다.
노래와 함께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노래 봉사활동이다.
지역 사회에 있는 여러 복지시설을 찾아 노래로 소통하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이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 인터넷 전자메일(tmd5644@naver.com)도 만들었다.
그는 “늦게 다시 시작하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며 “언젠가 모든 시민들이 알아주는 가수로 자리매김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교차로신문사/ 지정운 기자 zzartsosa@hanmail.net]
“촉망받는 밤무대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결혼과 함께 화려한 무대를 떠나야 했던 아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정 씨는 노래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보성이 고향이다. 학창시절 그는 노래의 대명사였다. 중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는 항상 그의 독차지였다.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에 20대 초반, 가수의 꿈을 안고 찾아간 곳은 수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봉조 씨와 절친한 친구였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선영 씨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스승은 정 씨에게 발성연습부터 시켰는데, 매일 새벽 5~6시 수원 팔달산에 올라 6개월 동안 혹독한 연습을 해야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스승에게 인정받은 그는 22살이 되던 해 6개월간의 군부대 위문공연을 첫 무대로 갖게 됐다.
이후 각지의 밤무대 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27살이 되던 해 인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당시 일본을 다녀와 개인 스폰서까지 구했지만, 결혼과 가수생활을 놓고 깊은 고민을 해야했던 것. 노래가 좋았지만 가수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던 그는 결국 평범한 주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가수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스승 선영 씨가 폐암으로 작고한 것도 결정타가 됐다.
결혼 후에도 그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고, 이를 증명하듯 97년 보성다향제 기간동안 열린 전국노래자랑에서는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수 생활을 시작하진 못했다.
이런 세월이 20여 년 흘렀다. 두 아들은 커서 철이 들었고, 묻어두었던 젊은 시절의 아쉬움도 새록새록 커져만 갔다.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에만 매달리며 잊었던 무대 조명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하기로 하고 용기를 냈다.
새로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 뿐이다. 이 때문에 순천을 중심으로 인근 시군은 물론 멀리 수원까지 자신을 원하는 곳은 달려간다.
정 씨는 “언제든 어디서든 불러만 주신다면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며 “이제는 원숙한 인생을 담아 노래를 통해 치유와 힐링을 이뤄보고 싶다”고 말한다.
노래와 함께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노래 봉사활동이다.
지역 사회에 있는 여러 복지시설을 찾아 노래로 소통하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이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 인터넷 전자메일(tmd5644@naver.com)도 만들었다.
그는 “늦게 다시 시작하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며 “언젠가 모든 시민들이 알아주는 가수로 자리매김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교차로신문사/ 지정운 기자 zzartsos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