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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한창기의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이사야의 ‘책 속 그곳’] 한창기의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by 순천광양교차로 2018.12.17

한글·토박이 문화 계승의 노력 ‘뿌리 깊은 나무’ 下
▲수오당 전경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이 예쁘고 열매가 성글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내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의 한 토막에서 잘라 온 <뿌리 깊은 나무>는 우리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전통문화를 지키고, 토박이 민중문화를 계승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1976년 순 한글 가로쓰기로 한창기 선생이 창간한 월간 종합 잡지다.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은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쓴 글을 엮은 책이다.

순천 낙안읍성 남문 밖 평촌 마을엔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자였던 고 한창기 선생이 수집한 유물 6500여 점으로 꾸며진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다. 성곽 남쪽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은 이 박물관은 한창기 선생이 지키고 싶었던 전통과 민중 문화의 얼이 담긴 곳이다.

수오당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의 너른 마당으로 나오면 부족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한옥 한 채가 금전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1980년에 한창기 선생이 보고 한순간 매료되었다는 이 집은 1922년 지어진 단소명인 김무규 선생의 고택이다.

지리산 아래 구례군 절골에 위치했던 것을 2006년 뿌리 깊은 나무 재단에서 구매해 박물관 마당으로 이전했다.
▲솟을대문

수오당이라 불리는 이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마주하고, 안채, 별채, 사당 등 여덟 채로 지어진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여기서 이 한옥이 지어진 1922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세의 문물이 밀려오는 1920년대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전통을 지키기도 버거웠을 당시를 생각하면 신식건축 양식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전통방식으로 지어낸 이 한옥은 시대적 측면에서 그 만큼의 의미가 있다.

한옥의 건축구조는 적절한 조립식으로 구례에 있던 고택을 옮겨와 다시 조립한 재활용이 가능한 건축방식이다.

다만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딘 기와는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고택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사당 지붕을 얹는데 사용했다.

사당의 기와 색이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다.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는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을 촬영한 장소다.

단소와 가야금의 명인이던 김무규 선생의 고택에서 서편제를 찍은 것은 자연스런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전통과 문화와 음악을 사랑했던 한창기 선생이 한 눈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연이 있는 고택으로 낙안 읍성을 내려다보는 주산인 금전산과도 조화롭게 어울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흥취를 갖고 있다.

그의 책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속에는 ‘그 사람들의 한평생’이라는 전라남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단편으로 전라남도에서 태어난 가시내와 사내의 일생을 본 듯 겪은 듯 쓴 글인데, 지역감정을 실어서 읽었는지 가장 끌리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봄이면, 들에 가서 삐비를 뽑아 먹었을 터이고, 뽕밭에 가서 오들개를, 산에 가서 산딸기와 포리똥을 따 먹었을 터이며... 가을이면 팽나무 타고 올라 팽을, 뒷산에 가서 깨금을 따 먹었을 터이고...”

괴기장시, 뻭따구, 뽀땃허게 등 예전엔 사용했지만 표준어에 대한 열망으로 잊고 지내던, 들으면 가슴으로 울리는 어머니의 언어들이 그의 책 속에서 툭툭 튀어나와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런 언어를 적재적소에 구사하는 현실 친구를 만나면 천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옛 말을 잊고 살다 한순간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데 이 책이 그렇다.

‘조상의 핏줄이 우리 몸을 빚는다면, 그 몸을 다스리는 우리 얼은 우리말이 엮는다’는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사는 토박이 언어에 대한 한창기 선생의 티 없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