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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이사야의 ‘책 속 그곳’]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1.28

순천대 박물관에서 만난 ‘겸재 정선’ (上)
▲순천대박물관

남쪽이라 따뜻하다 해도 겨울은 춥고 매섭다.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어서 빨리 날이 풀려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은 역시 매화다.

옛 조상들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았는지 화분에 심겨진 매화가 한 두 송이 피기라고 할라치면 꽃을 보러 오라 동무에게 간찰을 보내기도 했다.

정조시대 검서관으로 유명한 간서치 이덕무는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드는 방법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겸재 정선은 화가답게 그림으로 남겼다. ‘설평기려’는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있을 때 친구인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 약속하고 그린 것으로 ‘경교명승첩’ 속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그림 옆엔 “높은 두 봉우리 긴 자락 끝은 아득한 십리 벌판 일세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매화 핀 곳 알지 못 하네” 라는 제시가 붙어 있다.

그림 속에는 매화가지 한 줄기 등장하지 않고 매화를 찾으러 눈 쌓인 새벽길을 나귀 타고 나서는 선비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박물관 앞 뜰에 핀 홍매화

매화를 핑계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 친구를 핑계로 매화를 찾으러 가는 것인지 애꿎은 나귀만 새벽 댓바람부터 고생이다.

매화는 그리지도 않고 심안으로 심매를 찾으라는 어찌 보면 동무에게 보내는 익살스런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겸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왕제색도’는 인왕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고 끝까지 함께 한 친구 이병연이 살았던 집을 배경으로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와 그림을 서로 주고받으며 평생지기로 지내던 친구에게 매화소식을 알려주는 그림이 ‘설평기려’다.

제시가 붙은 ‘설평기려’는 성북동 간송미술관 소장으로 보러 가기엔 시간도 경비도 만만찮게 들게 생겼다. 그런데 이 ‘설평기려’와 같은 그림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겸재는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그리기도 했는데, ‘설평기려’도 그런 그림 중 하나다.

낙관의 위치와 제시가 없을 뿐 간송미술관의 ‘설평기려’와 구도나 디테일 면에서 거의 같은 그림으로 봐도 좋은 작품이다.

그 그림을 순천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우리 지역의 박물관에 겸재의 그림이 있다니.
▲설평기려(순천대박물관 소장)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는 전 중앙박물관장이었고, 현 겸재미술관장으로 있는 이석우 교수가 엮은 책이다.

겸재의 그림과 인생관을 담은 책으로 진경산수화에 대한 풀이가 쉽고 재밌다.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그린다기 보다 ‘화가의 뜻에 따라 경물의 분위기와 작가의 느낀 바를 재구성해서’ 그린 ‘산수의 진수와 본성을 그렸다’는 평이다.

실경을 그리긴 했으되 사물을 축소하거나 과장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지하면서 감동을 극대화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이것은 몇 년 전 고성의 큰 산불이 나 낙산사가 불타고 재건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낙산일출’을 그린 화가는 여럿 있었지만 그 중 겸재와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가 유명한데, 낙산사는 단원의 낙산사도를 기본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단원의 그림이 원형에 가까웠다는 이유인데, 겸재의 ‘낙산일출’은 진경산수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겸재의 ‘낙산일출’이 개인적으론 더 감동적이다.

겸재를 따라 인왕산, 금강산, 한강 등지를 유람했다면 다음에는 순천대박물관에 있다는 ‘설평기려’를 보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