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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이사야의 ‘책 속 그곳’]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2.07

순천대 박물관에서 만난 ‘겸재 정선’ (下)
▲순천대박물관

새해 인사를 한지 일주일 만에 친구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제법 향기도 난다’는 톡과 함께 꽃망울이 방울방울 맺힌 한 두 송이 피기 시작한 연분홍색 애기매화 사진이다.

순천은 첫눈이라 할 만한 것도 아직 보지 못한 터라 눈도 안 왔는데 벌써 매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니 겨울이 살짝 아쉽기까지 하다.

설중매가 있긴 한다지만 이런 날씨가 계속 된다면 함박눈은 영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단 아쉬움은 일어도 일단 매화 소식은 반갑다.

겸재 정선처럼 매화소식을 알려주는 친구가 있다 이 말이지. 화분에 심겨진 매화가 피기 시작했으니 머잖아 땅에 뿌리를 둔 매화도 피기 시작할 것이다.

‘설평기려’는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있을 때 친구인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 약속하고 그린 것으로 ‘경교명승첩’ 속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그림 옆엔 ‘높은 두 봉우리 긴 자락 끝은 아득한 십리 벌판 일세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매화 핀 곳 알지 못 하네’ 라는 제시가 붙어 있다.

제시가 붙은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이고, 겸재의 같은 그림 ‘설평기려’가 순천대박물관에 있다는 검색기록을 보고 순천대박물관을 처음 찾았다.

1·2층에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로 구성된 박물관은 예상보다 많은 유물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고고학실은 인근 지역의 산성, 절터 등을 발굴하고 그 유물을 훌륭한 역사자료로 갈무리해 방문객들에게 우리 지역에 살았던 고대 조상들의 흔적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2층 중앙에 복원 전시 중인 검단산성 우물은 그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우물의 발굴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만들어 놨다.

그런데 2층 전시실을 두 바퀴나 돌았는데도 ‘설평기려’를 찾을 수가 없다. 박물관에 전화로 문의해보는 수밖에. 보고자 했던 몇몇 그림들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는 답변을 듣고 첫날은 천천히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수장고에서 나온 유물

자료열람신청서를 작성하고 열람 일정을 조율하는 사이에 두 주가 훌쩍 지났다. 수장고에 보관 중인 유물은 수장고에서 나와 실온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드디어 수장고 문이 열리는 날, 18.5 x 25.8cm의 작은 그림이지만 코앞에서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설평기려’는 눈 쌓인 이른 새벽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가 매화를 찾아 떠나는 그림으로, 십리 벌판 너머 높은 봉우리의 산이 두 개 있고 산 밑엔 나무사이로 기와집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비단으로 보이는 천 위에 먹의 명암을 살려 눈 쌓인 가지를 표현하고 빨간 낙관마저 그림의 구도를 헤치지 않는 균형미를 보여준다.

겸재는 지방직으로 곳곳을 다녔으며 그 시대에 유행하던 유람으로 금강산, 설악산, 동해 등을 여행하고 명승지의 그림을 많이 남겼지만 유독 전라도 지역은 그림 인연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 그림이 어떻게 순대박물관에 소장되게 됐는지 궁금해 연유를 물으니, 강운 최승효 선생의 기증품 중에 이 그림도 포함돼 있었다는 대답이다.

박물관 2층 한자리를 차지한 강운 최승효 기증실은 한 사람이 노력으로 모은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호사를 누리게 된 바람직한 유물 보존 방식의 하나로 감사 받아야 마땅한 곳이다.

겸재의 ‘설평기려’ 열람을 기다리는 사이 박물관을 한 번 더 찾아 시간을 보냈었다. 우리 지역에 이런 박물관이 있어 문화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박물관 앞 뜰에 핀 홍매화

겸재를 그림으로 만나고 나오는 길, 박물관 앞뜰에 홍매가 핀 것을 아슬아슬하게 발견했다. 겨울 볕에도 향기가 붉게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