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책 속 그곳’] 도올 김용옥의 <우린 너무 몰랐다>
[이사야의 ‘책 속 그곳’] 도올 김용옥의 <우린 너무 몰랐다>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2.19
여순민중항쟁과 신전마을 이야기 (上)
▲ 낙안으로 이어지는 조정래길
옛 절 집의 고고한 아취와 여염집 분위기를 갖고 있는 선암사에서 옛 읍성이 있는 낙안들을 지나 벌교에 이르는 857번 지방도는 ‘조정래길’이라 이름 지어져 있다.
옛 읍성마을 낙안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그 남쪽 숨구멍이 바다로 이어진 참 꼬막의 산지 벌교다. 낙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동서남북 네 갈래다.
불여시가 나온다는 동쪽의 불재, 높은 고도 때문에 오금이 절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북쪽의 오금재, 서쪽 외서면에서 넘어오는 분계재 그리고 남쪽 벌교에서 들어오는 길목은 유일한 평지다.
옛 절 집의 고고한 아취와 여염집 분위기를 갖고 있는 선암사에서 옛 읍성이 있는 낙안들을 지나 벌교에 이르는 857번 지방도는 ‘조정래길’이라 이름 지어져 있다.
옛 읍성마을 낙안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그 남쪽 숨구멍이 바다로 이어진 참 꼬막의 산지 벌교다. 낙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동서남북 네 갈래다.
불여시가 나온다는 동쪽의 불재, 높은 고도 때문에 오금이 절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북쪽의 오금재, 서쪽 외서면에서 넘어오는 분계재 그리고 남쪽 벌교에서 들어오는 길목은 유일한 평지다.
▲오공치(오금재) 전망대.
그 중 낙안으로 들어서는 가장 환상적인 길은 선암사에서 오금재로 이어지는 조정래길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에서 ‘고향의 봄’ 같은 시골길을 운전하다 오금재 고갯마루에 서면 탁 트인 낙안들이 확 안겨오는 그 안온함을 한번쯤 느껴봐야 한다.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통학했던 다분히 주관적 견해이나 이 길을 넘어본 사람이면 아마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도올 선생은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조정래길에 터 잡은 신전마을 이야기를 꺼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고, 3년 후 제주4.3이 터진다.
그해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한 국군14연대의 제주도토벌 출동거부는 여순사건의 시발점이다.
그 중 낙안으로 들어서는 가장 환상적인 길은 선암사에서 오금재로 이어지는 조정래길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에서 ‘고향의 봄’ 같은 시골길을 운전하다 오금재 고갯마루에 서면 탁 트인 낙안들이 확 안겨오는 그 안온함을 한번쯤 느껴봐야 한다.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통학했던 다분히 주관적 견해이나 이 길을 넘어본 사람이면 아마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도올 선생은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조정래길에 터 잡은 신전마을 이야기를 꺼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고, 3년 후 제주4.3이 터진다.
그해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한 국군14연대의 제주도토벌 출동거부는 여순사건의 시발점이다.
▲신전마을 전경.
신전마을 이야기는 다음해 추석이 막 지난 어느 밤에 발생한 비극적인 이야기로 아직 6.25가 터지기도 전의 일이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산 속으로 숨어든 산사람을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1차 빨치산이라고 했던가, 암튼 그때 산사람들이 총상을 입은 14세 연락병 소년을 신전마을에 데려와 치료를 부탁하고 마을사람들은 소년을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동네아이들과 어울릴 만큼 회복됐다고 한다.
그런데 사단은 여기서 일어난다. 지나던 면서기가 아이들의 말을 듣고 토벌대에게 일러바치고 추석 다음다음날 토벌대가 신전마을에 들이닥친다. 그다음 순서는 토벌대의 역사와 한 치의 오차도 어긋나지 않는다.
아이를 치료하고, 재우고, 입히고, 홍시와 누룽지를 나눠준 사람들을 색출해 22명을 죽이고, 시체에 기름을 부어 태우고, 32가구가 사는 마을까지 몽땅 불 질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이 나가고, 장사 지낼 곡괭이도 없어 옆 동네 사람들이 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이고 신전마을 비극의 서막이다.
전쟁 전후에 일어난 제주4.3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보다 작은 규모의 사건이었음에도 신전마을 이야기는 훨씬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면 신전마을에는 어느 시골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국민학교가 있는데 나는 거기 졸업생이고, 신전마을엔 짝꿍도 살았고, 학교 뒷산이기도 한 신전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졸업사진도 찍었던 것이다.
심지어 친구들 중 그때까지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작년에 여순70주년을 맞아 여수MBC가 만든 다큐에 신전마을이야기가 나와서 친구들 사이에선 “설마 우리가 아는 신전은 아니겠지!”가 일관된 반응이었다. 우린 너무 몰랐다.
신전마을 이야기는 다음해 추석이 막 지난 어느 밤에 발생한 비극적인 이야기로 아직 6.25가 터지기도 전의 일이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산 속으로 숨어든 산사람을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1차 빨치산이라고 했던가, 암튼 그때 산사람들이 총상을 입은 14세 연락병 소년을 신전마을에 데려와 치료를 부탁하고 마을사람들은 소년을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동네아이들과 어울릴 만큼 회복됐다고 한다.
그런데 사단은 여기서 일어난다. 지나던 면서기가 아이들의 말을 듣고 토벌대에게 일러바치고 추석 다음다음날 토벌대가 신전마을에 들이닥친다. 그다음 순서는 토벌대의 역사와 한 치의 오차도 어긋나지 않는다.
아이를 치료하고, 재우고, 입히고, 홍시와 누룽지를 나눠준 사람들을 색출해 22명을 죽이고, 시체에 기름을 부어 태우고, 32가구가 사는 마을까지 몽땅 불 질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이 나가고, 장사 지낼 곡괭이도 없어 옆 동네 사람들이 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이고 신전마을 비극의 서막이다.
전쟁 전후에 일어난 제주4.3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보다 작은 규모의 사건이었음에도 신전마을 이야기는 훨씬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면 신전마을에는 어느 시골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국민학교가 있는데 나는 거기 졸업생이고, 신전마을엔 짝꿍도 살았고, 학교 뒷산이기도 한 신전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졸업사진도 찍었던 것이다.
심지어 친구들 중 그때까지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작년에 여순70주년을 맞아 여수MBC가 만든 다큐에 신전마을이야기가 나와서 친구들 사이에선 “설마 우리가 아는 신전은 아니겠지!”가 일관된 반응이었다. 우린 너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