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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그곳’] 팔마비와 백우비

[이사야의 ‘그곳’] 팔마비와 백우비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10.07

팔마비와 백우비에 대한 단상
▲순천시 중앙로에 자리한 팔마비

팔마비의 나비효과
순천대박물관에서는 학기마다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강좌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2019년 가을 학기 첫 강좌는 박물관장으로 새로 취임한 이욱 교수가 ‘순천의 역사와 브랜드화’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순천을 대표하는 것 중 왜 팔마비인가?”

중앙로(95번지) 대로변에 남쪽을 보고 서 있는 팔마비는 고려 시대 순천에 부임한 최석 부사의 공덕을 기리는 유물이다. 고려 이전 언제부터였을까? 관례처럼 지방관이 바뀔 때마다 지출되는 비용을 지방민이 부담했다. 퇴임 때마다 마련해야 하는 말 여덟 필은 요즘으로 치면 시장이 바뀔 때마다 승용차 여덟대 정도의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과했다. 관례를 빙자한 삥이다.

부사 최석은 이 관례를 끊은 최초의 고려인이다. 팔마비는 단지 말 여덟 마리를 상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석 이후 순천에 부임하는 부사는 누구도 퇴임 때 말을 요구하지 못하게 됐다는 데 큰 의미를 갖게 됐다. 최석 부사는 기득권을 포기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됨으로써 팔마비는 청렴함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것이 최석의 팔마비가 순천 부민에게 미친 나비효과다.

팔마비의 청렴함은 조선 시대로 쭉 이어져 서거정은 “연자루 앞에는 팔마비가 조용히 섰구나”라는 시를 지었다. 팔마비는 정유재란 때 부서진 것을 광해군 때 복원하고, 1930년대 시가지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 앉았다. 그때 팔마비는 헐리게 된 연자루와 헤어지게 된다.

조선 시대엔 팔마비 옆에 백우비가 함께 있었다. 1763년 순천부사 강필리는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지고 돌림병까지 돌아 관내 소가 80%나 폐사해 이듬해 농사를 시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사재를 털어 소 32마리를 지역에 분배했다.
▲죽도봉 공원 내 세워진 백우비(왼쪽)와 백우탑.

7년 후 소가 150여 마리에 이르자 부사의 공덕을 치하하는 비를 세웠다. 그러나 어느 해 홍수로 팔마비와 백우비가 유실됐는데 팔마비만 겨우 찾았다고 한다.

백우비는 1991년에야 죽도봉 공원에 복원된 연자루 옆에 다시 세워졌다. 그때야 백우비는 연자루와 만나게 된다.

백우비의 복원은 왜 늦어졌을까?

여기에는 한 단계 높은 목민의 정신이 요구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퇴임 때 말은 안 받아 갈 수 있어, 괜찮아. 그런데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휼하는 일까지 해야 하나?

그건 괜찮은 문제가 아니야!’ 하는 기득권 지배층의 심리가 저변에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팔마비와 백우비는 순천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순천시는 구도심에 도시재생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옥천교를 지나는 관문에 연자루가 들어서고 연자루 옆에 조선 시대처럼 팔마비와 백우비가 나란히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그때처럼 시인 문객들이 팔마비와 백우비를 칭송해 맞이할 것이다. ‘순천의 역사와 브랜드화’라는 강의를 듣다 팔마비에서 연자루, 백우비로 이어지는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