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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난중일기 - ④검단산성과 노루섬 장도

[이사야의 ‘책 속 그곳’] 난중일기 - ④검단산성과 노루섬 장도

by 순천광양교차로 2020.01.13

조선 포로들의 애끊는 울음이 잠긴 노루섬
▲검단산성에서 보이는 순천왜성과 노루섬 장도

순천 왜성은 근간에 알려지기 시작해 웬만하면 한번은 가봤음직 한데 서쪽으로 2.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검단산성은 이름만 알고 찾는 이가 드물다.

정유재란 말기 왜교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의 육군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명의 장수 유정이 말을 타고 검단산성을 올라 전투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저 왜성이 보이는 곳에 있는 작은 언덕쯤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천대박물관에서 범상치 않은 우물을 봤다. 검단산성에서 발견된 대형 우물로 2/3 크기로 축소한 모형이라고 했다.

검단 산성에 이런 우물이 있단 말이지.
▲검단산성 대형 우물

해룡에서 왜성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갑자기 검단산성 표지판이 나오면 길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산성을 오른다.

해발 183m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20m만 올라도 야산 쥐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이 토실한 가을에 찾아갔다. 알밤 하나씩 까먹고 가다 보면 금세 산성이 나온다.

건물지, 남문터, 북문터, 성벽, 저장고. 기본적인 인간 냄새가 나는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통하고 조망이 좋다. 군사요충지로 쓸만한 곳이다.

동쪽으로 왜성이 보이는데 사람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게 가깝다. 왜성 너머로 노루섬 장도와 광양만이 펼쳐지고 이순신대교가 놓인 묘도까지도 손에 잡힐 듯하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9월부터 11월까지 근 두 달간 치러진 왜교성 전투의 현장이다.

“우수영을 지나 순천 왜교에 이르니 이미 판축이 갖추어졌고 해안에 성을 쌓는데 높은 데는 하늘에 솟구쳐 은하수를 가르는 듯하고 많은 선박이 떼를 지어 정박해 있었다. 포로들이 탄 배 백여 척만이 바다 위에 출렁거릴 뿐이다.”

1597년 영광에서 포로로 잡혔던 유학자 강항이 4년여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쓴 <간양록>에 남긴 왜성의 모습이다.

정유년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한 후 왜군은 전라도 전역을 도륙한 뒤 순천 왜성에 진을 치고 눌러앉았다.

살아서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이 왜성 앞바다에 집결했다.큰 배에 옮겨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다.

“밤중이 되어 곁 배에서 어떤 여자가 울다 말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처절하였다…. 눈물마저 말랐건만 이 밤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소매를 온통 적시었다”고도 썼다.

왜성 앞바다 광양만은 왜교성 전투가 치러지기 이전에 조선 포로의 눈물이 밤을 적신 바다였다.
▲해룡산단 간척시 깎여나가고 있는 노루섬 장도

왜성 앞에 노루섬이라 불리는 장도는 왜군의 병참기지로 군량을 보관하는 창고로 썼고 포로를 가둬두는 해상감옥으로도 사용했다.

후에 왜교성 전투가 한창일 때 이순신과 진린은 묘도를 점거하고 수군의 작전본부로 삼았다. 노루섬을 장악하고 왜성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이용했는데, 이때 노루섬에 있는 곡식과 포로를 구했다고 한다.

지금 노루섬은 해룡산단이 간척되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섬 한쪽을 헐어서 간척지를 메꾸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예전 노루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선비 강항도 노루섬 연안에서 밤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포로들이 탄 배만 백여 척이 넘는다는 강항의 증언에 소름이 돋는다.

검단산성에 오르면 이렇듯 왜교성 전투가 벌어졌던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갖가지 감회에 젖어 들게 된다. 검단 산성은 백제 시대 유적지다.

백제인의 기술로 만든 대형 우물이 있는 곳에 조선, 명, 왜의 국제전이 벌어진 바다와 맞닿아 있고, 그 바다에서 최후를 마친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볼만한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