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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곽재구의 <신 포구기행>

[이사야의 ‘책 속 그곳’] 곽재구의 <신 포구기행>

by 순천광양교차로 2018.12.24

당신의 삶이 우주의 품위를 간직하기를
"와온은 딱 오늘만큼의 노을을 보여준다. 솔숲사이로 눈부시지도 않는 붉은 해가 딱 오늘만큼의 노을을 만들어내고 연인인 듯 친구인 듯 다정함이 묻은 사람들이 마침 떨어지는 노을을 보러
오는 곳이다. "

화요일인가, 수요일인가 퇴근길에 노을이 서산을 물들이더니 머리 위 하늘까지 빨개져 쓴 소주 한잔 들이 킨 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노을이 만들어질 땐 곽재구의 시집 한 권 접어들고 와온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노을을 보러 시인이 갔다던 12월에 가면 굴 까던 아낙들이 라면 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운 좋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가면 이런 노을을 다시 보여주려나. 와온 노을에 방점을 찍어 놓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견뎌 보자.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니 내가 코흘리개일 때 공개된 시다. 지친 사람들이 눈 오는 기차역 대합실에서 각자의 무게를 지고 톱밥난로 앞에 침묵으로 술 취한 듯 앉아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최근에야 이 시의 영험한 위로를 경험하게 돼서 늦게라도 철이 든 것이 어디냐는 주변의 축하까지 받았다. 곽재구는 포구를 여행하는 시인으로 <신 포구기행>을 올해 출간 했다. 주말 오후에 이 책을 끼고 화요일인가, 수요일인가 봤던 붉은 노을을 보러 와온으로 간다.

와온. 따뜻하게 누워 있는 바다.

와온은 여름 태풍의 꼬리를 보러 와보곤 했던 곳이다. 오키나와부터 올라오는 태풍은 순천을 지날 때 와온에 꼬리를 남겨두고 간다. 태풍을 피해 포구로 스며든 작은 고깃배들이 썰물에 드러난 갯벌에 그대로 박혀 따뜻하게 누워있던 바다다.

그래서 와온이라 불렀던 것일까. 노을을 보러 온 겨울 와온에도 썰물에 드러난 갯벌 위로 고깃배들이 따뜻하게 누워있고 지는 해를 쫓아가듯 바다의 경계는 서쪽으로 깊숙이 달아나 있다.
화요일인가, 수요일인가 봤던 노을만큼은 아니지만 와온은 딱 오늘만큼의 노을을 보여준다. 솔숲사이로 눈부시지도 않는 붉은 해가 딱 오늘만큼의 노을을 만들어내고 연인인 듯 친구인 듯 다정함이 묻은 사람들이 마침 떨어지는 노을을 보러 오는 곳이다.

부산 사는 지인이 와온은 곽재구 시인의 포구라 해서 갔더니 쓸쓸하더라 해서 ‘그래서 와온 인 것 아닐까. 북적이면 그도 아니겠지’ 했다.

곽 시인이 인도여행 중 만난 힌두교 승려의 이야기가 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당신의 삶이 우주의 품위를 간직하기를’ 무려 우주의 품위를 새해 인사로 받았다고 한다.

지는 해에도 ‘우주의 품위’가 있다. 떠나는 뒷모습이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변함없는 약속을 붉은 노을로 확인시켜 준다. 언제든 와온의 노을을 보러 가보시라.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그 다음은 바다를 물들이고 그 다음은 당신의 눈빛을 물들인다.

곽 시인은 답시로 ‘대못 박힌 자리’를 들려 줬더니 그가 환하게 웃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못은 붉게 물들어
바스러지고
나무의 몸에
빈 구멍 하나가 남았다”

나를 깊게 사랑하고, 당신의 결핍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삶의 품격이 깊어질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