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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곽재구의 <포구기행>

[이사야의 ‘책 속 그곳’] 곽재구의 <포구기행>

by 순천광양교차로 2018.12.31

붉고 푸른 온기를 품은 화포의 해맞이
▲화포의 해맞이

뜨고 지는 해와
철따라 찾아드는 철새와
들고 나는 바다가 있는
화포에 가면,
세상의 만만찮은 벽을 넘고
쪼개고 돌아 일 년을
살아냈으니 다음 한해를
살아갈 마법 같은 붉고 푸른 온기를 느끼게 된다.

어둠이 진을 치고 하늘에 푸른빛이 속내를 숨기고 있는 새벽, 유자차 한 잔 보듬고 구운 고구마 두어 개 포개 들고 길을 나선다. 일 년에 몇 번 일어나 보지 않은 새벽에 길을 나서면 그 동안의 게으름을 단번에 털어 낸 듯 안도감이 든다.

마치 새벽형 인간이라도 된 냥 가슴을 펴고 심호흡 한 번에 파란 공기를 폐로 보낸다.

차갑지만 시원한 냉탕과 온탕을 드나드는 기분이다. 몇 날 남지 않은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해돋이를 보러 화포로 가는 길이다.

화포를 알게 된 것은 십 몇 년 전 어느 방송국 책읽기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통해서다. 해 뜨는 마을, 해 지는 마을의 여행자라는 곽재구가 알려주는 화포는 그곳을 터로 잡고 사는 꽃처럼 아름다운 아낙들이 있는, 그녀들이 일 년 내내 ‘널’을 밀고 나가 잡는 맛조개만큼이나 가득하고 깊숙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남쪽 해안선 한 곳에 자리한 논마지기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 화포는 오로지 갯벌과 바다를 언덕 삼아 살아가는 어촌이다. 달의 농락으로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들고 나는 바다에 시간을 맞추고 사는 포구다.

동쪽, 새벽으로부터 여명의 기운이 뻗쳐오고 있다. 바다만큼 시퍼런 하늘이 붉은 기운을 토해내더니 남쪽 여수의 하늘과 서쪽 벌교의 하늘까지 온기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여수와 순천과 벌교는 육로의 발달로 인해 쇠퇴했지만 하나의 만으로 연결된 오랜 바닷길을 갖고 있다. 연안의 포구마다 어부들이 바다를 비비며 살고 있는 것이다. 마을길을 따라 포구로 내려가는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검은 봉지를 들고 나오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춥소오.”

“예, 따뜻하게 입고 왔어요.”

해맞이 하는 여행객을 맞는 것이 익숙한지 손지 같은 객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일몰을 기다리는 어선

해가 뜰 무렵 그들은 바다의 시간에 맞춰서 일터로 나가려는 듯하다. 포구에는 어선 한척이 연기를 뿜으며 출항을 준비하고, 간수를 담아 둔 샘 근처엔 촌 부부가 굴을 손질하고, 바다에 어장이 있는지 철새를 쫓아내느라 간짓대를 흔드는 할아버지는 바다를 향해 헛헛한 소리를 내지르는 새벽이다.

2~30마리씩 무리를 지어 순천만 쪽으로 날아드는 철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순천만 연안습지가 왜 철새들의 보금자린지 화포에 가 보면 알게 된다. 몇몇 해맞이 동지들이 갯가에 서서 붉어지다 밝아지는 쪽 하늘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
▼포구에 찍힌 철새 발자국

해를 기다리는 새벽의 시퍼런 공기와 하늘의 기운이 바다마저 붉게 물들이고 나면 해는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 변함없는 약속 때문에 우리는 해에게 희망을 갖는 것인가. 철새의 무리가 철따라 해를 가로질러 어김없이 순천만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인가.

밀물 때를 기다려 바다로 나가는 화포의 삶에 인사를 건네게 되는 것인가. 뜨고 지는 해와 철따라 찾아드는 철새와 들고 나는 바다가 있는 화포에 가면, 세상의 만만찮은 벽을 넘고 쪼개고 돌아 일 년을 살아냈으니 다음 한해를 살아갈 마법 같은 붉고 푸른 온기를 느끼게 된다.

일출시간을 확인하고, 알람을 맞추고, 뜨뜻한 유자차를 준비하고,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펼치고 인생의 꿈을 하나 꿔본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