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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강판권의 <숲과 상상력>

[이사야의 ‘책 속 그곳’] 강판권의 <숲과 상상력>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6.05

낙안읍성의 노거수를 만나러 가다 (上)
▲고목과 초가가 함께 숲을 이룬 낙안읍성

해가 길어지면 녹음도 짙어진다. 우물가 앵두나무에 잎이 나고 돌담길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던 매화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녹음은 더 짙어진다.

한해살이 들풀들이 앞다투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준비할 때, 보다 높은 곳에서 읍성 곳곳을 내려다보며 한 해를 바삐 시작하는 식물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가 있으니 읍성 안 노거수다.

낙안읍성 안에는 몇백 년은 족히 살았을 고목들이 여러 그루다. 13그루라는 이도 있고 15그루라는 이도 있다.

인간의 수명을 백 년이라 치면 몇백 년을 사는 나무 앞에서 고개가 숙어지는 대목이다.

태양이 뜨거워 지면 저절로 그늘을 찾아 들어가기 마련이다. 수백 년 인간에게 그늘을 만들어준 읍성의 노거수를 찾아가 본다.
▲둘레가 10m나 되는 은행나무 밑동

낙안읍성의 정문이랄 수 있는 낙풍루를 들어서 대로를 따라 읍성 중앙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고목은 은행나무다.

낙안읍성 전체 모양이 배 형상을 닮았다 하고, 중앙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가 28m나 돼서 풍수 학설상, 이 은행나무는 돛대에 해당한다.

멀리서도 잘 보이기 때문에 찾기는 쉽다. 키가 큰 것은 그리 놀랍지 않으나 가까이 가보면 나무 밑동의 둘레에 놀라게 된다.

요즘처럼 녹음 짙은 계절엔 줄기와 잎이 둘레가 10m나 되는 밑동을 가리고 있어 그 위용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수염 덥수룩한 할아버지 신선을 보는 기분이다.

그 옆에는 고만한 은행나무가 한그루 더 있다. 이 은행나무는 골목에 자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초가집 뒤꼍에 조용히 앉아 있어 찾아가는 길이 꼬불꼬불하다.

대로에서 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 사이로 남문으로 통하는 큰길이 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낙안읍성은 평지에 만들어진 계획도시였으니 T자로 대로를 만들었다면 그리로 통하는 길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낙민루 앞 느티나무

다시 중앙 대로를 따라 곧장 걷다 보면 낙민루 앞에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 느티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넓고 시원한지 갈 때마다 저절로 나무 벤치로 이끌려가 앉게 된다.

80년대 읍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기 전 읍성 안에는 지금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미용실도 있었고, 떡방앗간도 있었고, 약방도 있고, 보건소도 면사무소도 학교도 있고, 5일장도 섰다.

군내버스가 읍성 안으로 드나들던 시절, 이 느티나무는 버스가 승차하던 곳이었다. 그 시절의 건물들은 사라졌지만, 이 느티나무를 보면 그때의 추억들이 영상처럼 살아난다.

<숲과 상상력>은 나무 인문학자로 알려진 강판권의 신간이다. 그의 책에 낙안읍성 노거수는 없다.
그러나 노거수가 지키고 있는 읍성은 마치 하나의 숲인 것처럼 인식되고 몇백 년을 살아온 노거수와 만나는 일은 나무의 존재를 빌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가까이 있는 추억과 멀리 있는 역사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다른 저서 <나무열전>,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 <나무를 품은 선비>등 꾸준히 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