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그곳

[이사야의 ‘책 속 그곳’] 이호신의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上)

[이사야의 ‘책 속 그곳’] 이호신의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上)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7.03

새벽 산사의 청량함은 개망초로 피어나고
▲ 선암사 승선교

새벽 산사로 나서는 길이다. 일찍 서둘러 산사 앞 기사식당 누룽지로 가벼운 아침을 해결한다.

어려서는 소풍으로, 봄에는 늘어지는 벚꽃을 보러, 회사에선 단합대회로, 비 오는 날은 연꽃을 보러, 혹은 고즈넉한 옛 건축을 보러, 중력을 사이좋게 밀어낸 홍교를 보러도 갔다.

이번은 선암사 승탑을 보러 가는 길이다.

선암사는 산지사찰 일곱 군데를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그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산책하듯 드나들던 선암사가 세계인의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문화적 위상을 생각할 때 환영할 일이다. 방문객이 늘어나겠구나, 지금보다 소란스러워지겠구나 하는 아까움도 마음 한편에 있다. 선암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벌써 1년이다.

산지 승원의 매력을 일찍부터 알았던 작가 이호신은 산과 사찰의 가람배치를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라는 책에 담아 그리고 썼다.
특히 그림이 좋다. 수묵으로 그린 그림은 마치 조선 산수화를 보는 듯 고요하나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솔길을 걷는 두 사람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표정을 읽으려 애쓰게 된다. 간결한 터치로 나무와 돌담, 기와의 질감을 만족스럽게 표현했다.

그렇게 자주 찾은 선암사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온 적은 별로 없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산책하듯 다녀갔을 뿐이다.

선암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1.2km 계곡을 끼고 도는 초입 길은 산지 승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길쭉하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속세의 것을 두고 절집으로 들어서는 흥취에 취하게 된다.

승선교와 강선루는 선암사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유명하다. 강선루가 몇 년 전에 다시 지어지면서 기대에 부풀었다.

그동안은 오래된 누각이라 위험하다 오르지 못하게 했지만, 새로 만들어진 강선루에는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강선루는 출입금지다. 새 누각을 관상용으로만 남겨두다니 아깝지 않은가. 강선루에서 바라보는 계곡과 승선교는 또 다른 모습일 터이다.

선암사는 초입의 정취와 승선교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유물로 오래된 승탑 3기가 선암사 뒤쪽 야생차밭 위에 흩어져 있다.

고려 시대의 승탑 중 하나인 북승탑은 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승탑의 주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조와 조형의 시대적 고증이 고려 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후대의 부도처럼 절집 입구에 모여 있지 않고 초기 승탑은 산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승탑으로 오르는 길가엔 개망초가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었다.

새벽 산사의 청량함이 개망초로 피어나서 승탑을 찾아 오르는 산길이 반갑다. 새벽 산사의 청량함이란 이런 것이다.

북승탑으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르다. 야생차밭을 지나 100m쯤 올랐을까. 해설사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찾는 걸 포기 했을지도 모르겠다.
▲ 선암사 뒤쪽 야생차밭에 위치한 북승탑

북승탑 주변엔 암자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오르고 보니 앞산의 산세가 제법이다. 내려오다 호두나무에 호두를 발견했는데, 예전 암자의 주인이 심었을 호두나무의 후손인 건가.

사라진 암자에 남은 호두나무와 엉겅퀴 무리가 철마다 승탑과 함께했음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연과 게임이 안 되는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암자가 먼저인지, 승탑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둘이 한 몸인 듯 선암사를 지탱하던 노승의 탑 앞에서 사방이 고요하다.

이호신은 산수화처럼 고요하나 옛 승탑은 나그네의 목마름을 알 것이다.

“오느라 힘드셨소, 차 한잔하고 가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