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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이호신의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下)

[이사야의 ‘책 속 그곳’] 이호신의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下)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7.10

정조의 소망을 기도하던 원통전
▲선암사 원통전.

새벽 산사의 청량함에 취해 승탑을 돌아보고 대웅전으로 내려서면 아침 산사를 찾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선암사 대웅전 앞에는 2기의 탑이 나란한데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슷하다.
▲선암사 대웅전 앞 쌍탑.

그 시대의 양식이 전국에 퍼져나간 증거다. 전쟁과 화마로 인해 절이 불타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되기도 하는데 선암사는 그때마다 재건되는 행운을 얻었다.

유난히 불에 취약했던지 곳곳에 물과 관련된 기호와 기원이 남아 있다.

선암사 대웅전 뒤로는 여러 전각이 모여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중 처마가 앞으로 튀어나온 T자 모양의 건축물이 원통전이다.

이곳은 정조의 후사를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드린 곳이라 한다. 조선의 문화부흥을 이끌었던 군주 정조는 후사에 대한 근심이 대단했다. 첫 왕후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후궁을 두어 아들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후사에 대한 근심은 날로 무거워졌다. 이때 선암사 눌암스님이 원통전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고 정조는 순조를 얻었다고 한다.

후에 순조가 <대복전>이라는 현판을 써 보냈는데 지금도 원통전 내부에 걸려있다.

순조 21년에 선암사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소실 될 때 바로 중창이 시작된 것도 순조의 영향이 있었지 않았을까. 다음 해까지 빠르게 중창 불사가 이뤄졌다.

정조의 염원을 기원했던 원통전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도 특별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의 기본 구조에 중앙 쪽이 앞으로 튀어나온 T자형 구조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여러 전각 사이에 있어 전체적인 형태를 보기 쉽지 않고 입구도 건물 사이로 들어가는 구조여서 원통전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원통전은 순조의 탄생으로 인해 기도발이 센 곳으로 명성을 얻은 모양이다. 지금은 천일기도 처로 사용되고 있다.

원통전의 목단무늬 창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나의 통으로 조각된 모란꽃이 잎사귀와 이어지면서 하나의 문짝으로 조각돼 있는데 그 도톰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에 매료됐다.

기둥으로 써도 충분한 목재를 문짝을 조각하는 데 썼으니 원통전을 짓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원통전 오른쪽을 돌아 문을 나서면 600년 된 선암매가 있다. 매화 핀 곳마다 열매를 달고 있다.

무전(無憂殿) 담장 안에선 스님이 매실을 수확하고 계시는데 그 열매를 언제 다 따실지 걱정이다.

조계산은 두 개의 고찰을 품고 있다. 서쪽엔 송광사, 동쪽엔 선암사가 있다.

송광사에 가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했던 관음전이 있고, 선암사에 가면 정조의 후사를 기원했던 원통전이 있다.

조선의 왕과 세자 중 굵직하게 시대를 살아간 인물과 연관된 곳이 한양과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 조계산 자락에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이런 내력과 사연들 속에 함께 묻어 있는 것이다.

선암사의 이쁨을 노래한 시나 문학작품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중 이호신의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는 시인이면서 그림도 그리는 작가가 산중의 절집을 찾아다니며 쓰고 그린 그림이 있는 책이다.

선암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의 그림 속 선암사는 부감법을 이용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선암사를 다녀왔다면 그의 그림 속에서 낮에 봤던 풀꽃과 계곡의 물소리 묵은 나무에 딱따구리 소리가 들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