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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한국인 디아스포라 2

[이사야의 ‘책 속 그곳’] 한국인 디아스포라 2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09.02

연자루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죽도봉 공원 내 백우비, 백우탑.

디아스포라는 주로 유대인을 지칭하는 단어였는데, 조국을 잃고 세계 각지를 떠도는 흩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가난이나 전쟁으로 혹은 정치적인 희생자로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는 고대부터 있었다. 순천에도 디아스포라의 흔적은 남아 있다.

죽도봉에 가면 재일교포 김계선 선생이 복원한 연자루와 월등 출신, 오사카 별이라 불리는 호산 강계중 선생의 비가 있다.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타의든 자의든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이 많다.

대부분 힘들고 안타까운 생활을 하다 타지에서 죽거나, 돌아오거나 혹은 정착했다.

그중 이재에 밝은 이가 있어 큰돈을 번 재일교포도 있다.

1930년 일제가 전국적으로 시행한 시가지 정비사업을 빌미로 순천성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연자루도 헐리게 된다.

1978년 재일교포 김계선 님의 후원으로 지금의 죽도봉 공원 한편이 복원됐다.
▲김계선 선생이 복원한 연자루.

낙안읍성의 낙민루,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전라도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순천부 남문의 누각이었던 연자루다.

요즘 중앙동, 행동 일대를 지나다 보면 도시 재생사업이 한창이다. 예전 순천 남문 일대를 부분 복원하고 문화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여기에 연자루도 제자리를 찾아 남문 위에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될지는 미지수다.

비 오는 날 아침 연자루를 보러 갔다가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근처에 백우비가 있다는데 하도 오랜만이라 위치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팔마비는 들어 봤어도 백우비는 처음 들어본 것이다. 재차 물어도 백우비가 맞는다는 대답이다. 검색해 보니 근처에 과연 백우비가 있었다. 어르신께 백우비의 내력을 듣게 됐다.

1763년 순천에 부임한 강필리 부사는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의 생활이 궁핍해지고 돌림병까지 돌아 관내 소가 80%나 폐사해 이듬해 농사를 시작하기도 어려운 곤경에 처하자 사재를 털어 소 32마리를 지역마다 분배했다.

7년 후 그 소가 150여 마리로 늘어나 비를 세워 강 부사의 공덕을 치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홍수로 비는 유실되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김계선 선생 공덕비.

1991년에 순천시에서 순천향교 유림, 지방 유지, 진주강씨 문중의 후원으로 다시 백우비를 지금의 자리에 설립하게 됐다.

이때 총사업비 1억 5000만 원 중 1억 2000만 원을 강씨 문중에서 헌사했다.

목민관으로서 부사 강필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선비였다.

조선 시대에 백우비는 팔마비와 함께 읍성 중앙에 자리해 오가는 이들에게 귀감이 됐지만, 죽도봉 인적 뜸한 곳에 있어 연자루와 함께 그 진가를 알릴 길이 요원하다.

백우비를 찾다가 발견한 호산 강계중 선생 비가 또 놀랍다. 월등에서 태어나 징용으로 끌려간 강계중은 해방 후 오사카에서 한인회를 조직하고 재일동포 모국방문과 한국어 교육에 힘쓰고 농업연수생을 초청해 귀국할 때 제주에 감귤나무 100그루를 기증했다.

고국을 위한 지원, 기증, 기부활동을 한 공로로 그의 비는 선조인 진주강씨 강필리 부사의 백우비 옆에 있다.

연자루를 복원한 김계선 님, 오사카의 별로 불린 호산 강계중 선생, 독립운동가 후손이면서 쿠바 혁명을 이끈 헤로니모, 독도 문제에 힘쓰고 있는 호사카 유지 교수 모두 한인 디아스포라다.

백제인, 고려인, 조선족을 모두 포함한 재외동포, 디아스포라는 800만에 이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