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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책 속 그곳’] 난중일기 - ③백의종군로와 조선수군 재건로

[이사야의 ‘책 속 그곳’] 난중일기 - ③백의종군로와 조선수군 재건로

by 순천광양교차로 2019.12.23

정유년 “4월 1일 맑음.옥문을 나왔다.”
▲남도삼백리길 백의종군길 수군재건로가 함께 한 서면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남쪽으로 갈 길이 멀다. 거쳐 순천에 당도했건만 날개 잃은 수군의 장수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없다.

그럴 거면 어머니 장례는 치르게 해줘야지 야박하구로.

순천에서 보낸 시간은 무료했으나 옥중에 상한 몸만큼은 치유하는 시간이 됐을 것이다. 보름 동안 정원명의 집에 기거하다 6월에 초계의 권율 휘하로 들어간다.
▲주암면 창촌(부유창)에 있는 조선수군 재건로 표지판.

육군의 모양을 했지만, 이순신은 바다에 영혼을 둔 뼛속까지 수군이다. 7월 15일 원균이 폐사하고 16일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패망한 뒤 17일 만에 통제사로 재임명 된다.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역량을 집중시킬 때 왜적은 8월 3일 벌써 섬진강 하구에 상륙해 전라도를 도륙하기 시작한다. 전라도 전역이 왜군의 습격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뒤쫓아 오는 왜적을 꼬리에 달고 수군 재건을 위해 티끌이라도 끌어모으고 있었다.

남원, 구례, 순천, 백의종군 때 걸었던 길은 순천으로 되돌아오면서 조선수군 재건로가 됐다. 정유년 일기를 읽다 ‘면사첩’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죽음을 면한다는 뜻이 이순신에게 내려진 유지인 줄 착각했다. ‘열심히 싸워주면 지난번처럼 잡아 죽이려 들진 않겠다’라는 뜻인 줄 생각했다. 선조에게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군량미 한 톨이라도 보태줘야 할 것 아니냐!’라고.

좌수영 우후 이몽구는 칠천량해전 당시 여수 좌수영을 지키고 있었는데, 조선 수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났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돌아왔는데 그런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곤장(80대)을 쳤다. 군영 이탈죄도 무거운데 군기와 군량을 수습하지 않아서 아마도 왜군의 수중에 들어간 모양이다.

곤장을 맞은 뒤에도 그의 처형을 논하러 중앙에서 선전관의 유지가 내려온다. 당시 면사첩이 수군, 육군 포함해서 3만 장이 발행됐다고 하니, 칠천량 패전 이후 군사를 모으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됐을 거라 짐작된다. ‘너희 죄를 사해줄 테니, 다시 싸워라!’

이런 열악한 사정을 안고 있는 길이 조선수군 재건로다. 백의종군일 때는 군사도, 물자도, 전략도 있었으나 이순신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면, 수군 재건로는 군사도 물자도, 전략도 미약해서 역시 어떤 결정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암면 창촌(부유창)에 있는 수군재건로

조선수군 재건로 3코스는 석곡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주암, 부유창(창촌), 승주, 서면(학구리), 순천, 낙안에 이르는 구간이다.

78km에 이르는 구간으로 자동차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이순신은 군기와 병사를 수습하면서 하루 반 만에 달려갔다.

부유창은 곡식 창고가 있던 주암면 창촌의 옛 지명이다. 왜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창고를 불 질러 곡식이 한 톨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주암면 창촌에 있는 부유창터

후에 명의 장수 유정이 왜성을 공략하다 실패하고 후퇴한 곳도 부유창이었다.

9월 16일 그동안 키워온 수군을 칠천량에서 잃은 지 두 달 만에 명량해전을 치른다.

그 참담함을 어찌 다 말하랴. 온 역량을 집중시켜 한 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순신은 서해의 고군산도까지 후퇴해서 승첩에 대한 장계 초본을 수정한다.

서해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아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전라좌수영 전부와 전라우수영(명량해전 격전지)까지 왜군에게 내어준 것이다.

정유년 겨울,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지나간 마을마다 짙은 절망 속에서 겨울을 맞이했다.

지금은 이순신이 지나온 마을마다 탐방코스를 만들고, 이순신의 발자국을 따르고 있다.

수군 재건로는 마을과 마을을 잇고, 강과 산을 가르는 옛길의 정취와 더불어 우리 마을에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