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순천 독립운동가 재조명
‘3·1운동 100주년’ 순천 독립운동가 재조명
by 이보람 기자 shr5525@hanmail.net 2019.01.16
박항래 의사·조경한 선생
순천시가 정부의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에 동참하는 취지로,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인 박항래 의사와 백강 조경한 선생 알리기에 나섰다.
15일 순천시에 따르면, 박항래 의사는 1919년 순천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로, 1871년 승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한 달여 뒤인 4월 7일 지금의 남문다리에 자리했던 ‘연자루’에 올라 순천장날에 모여든 시민을 향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선도했다.
박항래 의사는 시위 도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19년 4월에 10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극심한 고문으로, 그해 11월 3일 49세의 나이로 옥중 순결했다.
후손들은 1974년 죽도봉공원에 선생의 행적을 기린 기적비를 세웠다.
또한 순천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부르짖던 박항래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순천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지난 2011년 8월 당시 연자루 위치였던 남문다리 옆에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다.
백강 조경한 선생은 1900년 주암면 출생으로, 1921년 만주에 있는 ‘독립단’ 의 국내 지하공작 연락원으로 활약하다 1926년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겨 ‘배달청년회’와 ‘배신학교’을 창설해 교포들에게 애국항일사상을 고취 계도하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선생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해 일으킨 ‘9·18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군’을 조직할 당시, 수백 명의 ‘유격독립여단’을 이끌고 북만주와 동만주 등 객지에서 3년 동안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다 임시정부가 진용을 확대하면서 선생은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선임됐고,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일원이 됐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돼 백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내공작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다음해 일본의 패망으로 동년 겨울에 임시정부 각료와 귀국 후 임시정부의 14개 정책을 국내에 반포하는 등 민족정기의 진흥에 전력했다.
이후 선생은 1962년 3·1절에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남 순천·승주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순천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2009년 금당공원에 추모비와 조형물을 설치해 관리 중에 있으며, 3·1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순천시는 그 밖에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5일 순천시에 따르면, 박항래 의사는 1919년 순천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로, 1871년 승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한 달여 뒤인 4월 7일 지금의 남문다리에 자리했던 ‘연자루’에 올라 순천장날에 모여든 시민을 향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선도했다.
박항래 의사는 시위 도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19년 4월에 10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극심한 고문으로, 그해 11월 3일 49세의 나이로 옥중 순결했다.
후손들은 1974년 죽도봉공원에 선생의 행적을 기린 기적비를 세웠다.
또한 순천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부르짖던 박항래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순천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지난 2011년 8월 당시 연자루 위치였던 남문다리 옆에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다.
백강 조경한 선생은 1900년 주암면 출생으로, 1921년 만주에 있는 ‘독립단’ 의 국내 지하공작 연락원으로 활약하다 1926년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겨 ‘배달청년회’와 ‘배신학교’을 창설해 교포들에게 애국항일사상을 고취 계도하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선생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해 일으킨 ‘9·18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군’을 조직할 당시, 수백 명의 ‘유격독립여단’을 이끌고 북만주와 동만주 등 객지에서 3년 동안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다 임시정부가 진용을 확대하면서 선생은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선임됐고,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일원이 됐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돼 백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내공작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다음해 일본의 패망으로 동년 겨울에 임시정부 각료와 귀국 후 임시정부의 14개 정책을 국내에 반포하는 등 민족정기의 진흥에 전력했다.
이후 선생은 1962년 3·1절에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남 순천·승주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순천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2009년 금당공원에 추모비와 조형물을 설치해 관리 중에 있으며, 3·1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순천시는 그 밖에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