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역사를 더듬다> 죽도봉공원 김종익 동상

역사를 더듬다> 죽도봉공원 김종익 동상

by 운영자 2016.07.08

일제강점기 ‘순천의 선각자’ 우석 김종익 선생

미래에 투자하여 생리를 열음이여 멀고 긴 눈으로 세대를 살찌우다
- 김종익 선생 기념비 中
(1969년 순농동창회)
시 중심부에 위치한 죽도봉공원에는 팔마탑을 비롯해 순천의 역사와 인물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즐비하다. 이들 가운데 앉아있는 모습에서도 꼿꼿한 기품이 느껴지는 한 인물의 동상은 특히 눈길을 잡아끈다. 바로, 우석 김종익(友石 金鐘翊, 1886~1937) 선생의 동상이다.

일제강점기 실업가이며 교육사업가로도 유명한 그는 순천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 설립 등 지역의 인재 양성을 위해 5000억 원(당시 175만 원)에 해당하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인물이다.

1886년 순천 월등면 출생의 우석(友石) 김종익 선생은 ‘김학모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을 갈 수 없다’는 말이 떠돌 정도의 거부였던 묵초 김학모(김사천)의 장남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자제로 성장했다.

논 300만 평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김종익 선생은 일본 메이지대(명치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갖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길 거부하고 민족자본 형성을 통한 독립을 꿈꾸는 민족자본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선택에는 서울 중동학교 시절의 배움과 일본 유학시절 만난 인촌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김양수 등 우국지사들과의 교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선생은 일제치하 조국의 미래는 ‘교육’과 ‘식산(殖産)’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제지, 조선제사 등의 사업체 투자로 재산을 배로 늘리며 경제 구국의 원대한 꿈을 실현해가는 듯 보였지만 1937년 5월, 갑작스레 찾아든 병마로 51세 나이에 타계하고 만다.

그러나 임종 직전 재산의 절반인 175만 원을 사회사업에 희사함으로써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선생은 유언으로 △불우한 한국 학도들에게 학비를 대줄 것 △순천농업학교를 정규 5학년제인 갑종학교로 승격시킬 것 △순천 남녀고등학교를 설립해 줄 것 등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언대로, 선생이 생전 설립한 순천농업학교(1935, 현 순천대학교)는 그의 임종 이후 이듬해 갑종학교로 승격됐고 이후 5년제로, 또 다시 8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오늘날의 순천대학교가 됐다. 또한 그가 사회에 환원한 돈은 1938년 순천공립중학교(이후 순천중학교·순천고등학교로 분리), 순천여자고등보통학교(1940)를 세우는데 기여했으며, 장학회 ‘묵초 육영회’ 설립을 통한 육영 사업과 적십자사와 나병협회 등을 후원하는 사회사업에 사용됐다.

이외에도 한국성악연구회 발족을 통한 국악발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재 고려대병원) 설립을 통한 의학 발전 및 여권 신장에도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자녀들에게 “사람은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여재는 마땅히 사회공익사업에 쓰는 것이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했다는 그는 나눔 생활을 몸소 실천해온 선각자였으며,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이다.

순천의 후학들은 죽도봉공원 외에도 순천대 등에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지금도 그를 잊지 않고 있다.

[순천광양교차로 / 이보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