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광양의 정체성② 호국의 도시
기획-광양의 정체성② 호국의 도시
by 운영자 2017.06.02
광양 ‘불의와 맞서 싸운 의로운 우국충절 고장’
□ 글 싣는 순서
1. 개척정신이 강한 시민
2. 호국의 도시-①
3. 인물의 고장
4. 먹거리가 풍요로운 고장
5. 경제 중심도시
대하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을 집필한 정찬주 작가는 소설에서 광양(光陽)의 양(陽)은 태양(太陽)의 준말이며, 이는 임금 혹은 임금의 은혜를 상징하는 단어라고 말했다.
정 작가의 말에 따르면 광양은 임금의 은혜가 빛나는 곳, 즉 살기 좋은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했다.
‘호남이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반만년 동안 약 3000번에 달하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해 내고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 수많던 외침 속에서 위기를 맞았던 것은 광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양은 임진왜란과 동학 농민 운동, 항일 독립운동, 그리고 광주 학생 운동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불의와 맞서 싸운 기록들을 문헌과 장소 등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광양은 임금의 은혜가 가득한 축복받은 살기 좋은 곳이며, 불의와 맞서 싸운 의로운 우국충절의 고장이었다는 것이다.
아픈 역사 속 충절 바친 광양
진월면 선소(船所)는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임진장초(壬辰將草)에 기록돼 있는 것처럼 임진왜란 전후, 조선 수군의 배를 수리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시 광양현감은 어영담이었으며, 물길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중부장으로서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해전의 연전연승에 큰 공을 세웠다.
또 어영담의 살신성인과 함께 한 광양인들은 육상 의병 활동에서도 목숨을 바치며 충정을 빛냈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출동했던 군함이 ‘광양함(光陽艦)’이었다.
‘천안함’이 독립주권을 상징하는 천안시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기념관을 기념해 붙인 군함 이름이며, ‘독도함’은 영토 자주권을 상징한 이름이고, ‘충무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이름이라는 점에서 ‘광양함’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임진왜란 때 광양 사람들이 만든 군함인 ‘광양선’은 타 고을에서 만든 군함에 비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따라서 ‘광양함’이 우리 영토 해상을 누비고 있다는 것은 광양의 선인들이 목숨 바쳐 우리 후손들에게 안겨준 역사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경상우수사였던 배설 장군이 광양 선소에 배 12척을 숨겨 수리했고, 이 12척의 배를 명량대첩에 투입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남긴 그 유명한 한마디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 :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남아 있다”는 광양 후손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자부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순천광양교차로 / 김호 기자 giant1kim@hanmail,net]
1. 개척정신이 강한 시민
2. 호국의 도시-①
3. 인물의 고장
4. 먹거리가 풍요로운 고장
5. 경제 중심도시
대하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을 집필한 정찬주 작가는 소설에서 광양(光陽)의 양(陽)은 태양(太陽)의 준말이며, 이는 임금 혹은 임금의 은혜를 상징하는 단어라고 말했다.
정 작가의 말에 따르면 광양은 임금의 은혜가 빛나는 곳, 즉 살기 좋은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했다.
‘호남이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반만년 동안 약 3000번에 달하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해 내고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 수많던 외침 속에서 위기를 맞았던 것은 광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양은 임진왜란과 동학 농민 운동, 항일 독립운동, 그리고 광주 학생 운동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불의와 맞서 싸운 기록들을 문헌과 장소 등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광양은 임금의 은혜가 가득한 축복받은 살기 좋은 곳이며, 불의와 맞서 싸운 의로운 우국충절의 고장이었다는 것이다.
아픈 역사 속 충절 바친 광양
진월면 선소(船所)는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임진장초(壬辰將草)에 기록돼 있는 것처럼 임진왜란 전후, 조선 수군의 배를 수리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시 광양현감은 어영담이었으며, 물길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중부장으로서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해전의 연전연승에 큰 공을 세웠다.
또 어영담의 살신성인과 함께 한 광양인들은 육상 의병 활동에서도 목숨을 바치며 충정을 빛냈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출동했던 군함이 ‘광양함(光陽艦)’이었다.
‘천안함’이 독립주권을 상징하는 천안시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기념관을 기념해 붙인 군함 이름이며, ‘독도함’은 영토 자주권을 상징한 이름이고, ‘충무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이름이라는 점에서 ‘광양함’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임진왜란 때 광양 사람들이 만든 군함인 ‘광양선’은 타 고을에서 만든 군함에 비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따라서 ‘광양함’이 우리 영토 해상을 누비고 있다는 것은 광양의 선인들이 목숨 바쳐 우리 후손들에게 안겨준 역사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경상우수사였던 배설 장군이 광양 선소에 배 12척을 숨겨 수리했고, 이 12척의 배를 명량대첩에 투입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남긴 그 유명한 한마디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 :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남아 있다”는 광양 후손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자부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순천광양교차로 / 김호 기자 giant1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