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3일 낙안읍성 서문 목이 터져라 외친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4월 13일 낙안읍성 서문 목이 터져라 외친 “대한 독립 만세”
by 운영자 2014.02.28
낙안 안호영 선생 등 유생층 주도 … 벌교·낙안 등서
4월 9~13일 세 차례 조직적 항일 만세 운동 벌여
4월 9~13일 세 차례 조직적 항일 만세 운동 벌여

3·1운동하면 유관순 열사와 천안의 아오내 장터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가까운 우리 지역에서도 조직적인 항일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많겠지만, 순천 낙안읍성에는 ‘낙안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3·1절을 앞두고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낙안 안호영 선생, 서울서 독립선언서 들여오다
1919년 4월 13일. 순천시 낙안면 서내리 낙안읍성 서문에서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진 것은 순천 낙안면의 안호영 선생(대한제국시절 내관)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포고문 등 밀서를 가지고 들어오면서였다.
안호영 선생은 낙안의 이병채, 안규휴, 김종주 등 유림들에게 파리강화회의 등 국내외 정세를 전하며, 만세 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에 전평규 등은 “조선 각 도에 걸쳐 국권을 회복코자 조선독립 만세시위를 외치고 있음에 뜻을 같이 한다”며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체계적 만세시위 위해 조직 구성
4월 2일 안호영은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이병채(당시 훈장), 안규휴, 안주환, 김규석, 오병원, 김종주(최익현 의진 활동), 안태성 등 8명의 동지를 모아 신기리 뒷산에서 구국결사체인 ‘도란사(桃蘭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안호영은 전평규를 시켜 4월 3일 김천근 집에서 행동대격인 ‘이팔사’를 조직케 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친계’로 가장했다.
조직원은 전평규, 안응섭, 박영진, 안종귀, 김창기, 강정수, 오영태, 곽인석, 안규삼, 정갑표, 안규진, 한철순, 한흥량, 김만득, 안백순, 안덕환, 안담환, 안일삼, 송인수, 오수연, 김오현, 임재성, 안규정, 김천안, 신용석, 전인채, 오일준, 한흥조, 안은규, 안상규, 오병귀, 안용갑, 윤점수 등 33인이었다.
이들은 효과적인 만세시위를 위해 3개 대대로 분산해 계획을 세웠다.
제 1대대는 전평규를 중심으로 4월 9일 벌교의 장좌리 아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제 2대대는 김종주를 중심으로 4월 13일 낙안읍성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제 3대대는 안용갑을 행동대장으로 4월 14일 벌교의 장좌리 아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등 계획을 세웠다.
낙안 출신의 유흥주와 김종주 등은 4월 13일 낙안장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집에서 태극기를 장만했다.
이들은 낙안읍성 서문 밖에서 박태문, 배윤주, 배형주, 김선제 등과 함께 오후 2시경 성 안으로 행진하며 ‘대한독립기’와 ‘조선독립기’라고 쓰인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에 모여든 군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이들은 시위 군중을 규합한 후 만세를 부르며 서문 안으로 진출하던 중 일제 헌병 노다(野田喜一) 상등병 등이 무력으로 제지하자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종주와 그 아들 김선제 등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었고, 시위 주도자들은 체포됐다.
이때 체포된 유흥주와 김종주는 징역 1년 6월, 박태문·김선제·배윤주 등은 6월의 옥고를 치렀다.
현재 낙안읍성 동문 밖에 1998년 낙안초등학교에서 이전해 와 건립한 ‘낙안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유생층 주도, 의병항쟁과 연계
낙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유생층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특히 김종주는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말 의병항쟁이 3·1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도란사’란 조직을 만들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행동대격인 ‘이팔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조직을 ‘위친계’로 가장하는 등 조직적인 운동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각 지역별로 분산해 만세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낙안 만세시위의 연계성을 확보하고 있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많겠지만, 순천 낙안읍성에는 ‘낙안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3·1절을 앞두고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낙안 안호영 선생, 서울서 독립선언서 들여오다
1919년 4월 13일. 순천시 낙안면 서내리 낙안읍성 서문에서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진 것은 순천 낙안면의 안호영 선생(대한제국시절 내관)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포고문 등 밀서를 가지고 들어오면서였다.
안호영 선생은 낙안의 이병채, 안규휴, 김종주 등 유림들에게 파리강화회의 등 국내외 정세를 전하며, 만세 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에 전평규 등은 “조선 각 도에 걸쳐 국권을 회복코자 조선독립 만세시위를 외치고 있음에 뜻을 같이 한다”며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체계적 만세시위 위해 조직 구성
4월 2일 안호영은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이병채(당시 훈장), 안규휴, 안주환, 김규석, 오병원, 김종주(최익현 의진 활동), 안태성 등 8명의 동지를 모아 신기리 뒷산에서 구국결사체인 ‘도란사(桃蘭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안호영은 전평규를 시켜 4월 3일 김천근 집에서 행동대격인 ‘이팔사’를 조직케 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친계’로 가장했다.
조직원은 전평규, 안응섭, 박영진, 안종귀, 김창기, 강정수, 오영태, 곽인석, 안규삼, 정갑표, 안규진, 한철순, 한흥량, 김만득, 안백순, 안덕환, 안담환, 안일삼, 송인수, 오수연, 김오현, 임재성, 안규정, 김천안, 신용석, 전인채, 오일준, 한흥조, 안은규, 안상규, 오병귀, 안용갑, 윤점수 등 33인이었다.
이들은 효과적인 만세시위를 위해 3개 대대로 분산해 계획을 세웠다.
제 1대대는 전평규를 중심으로 4월 9일 벌교의 장좌리 아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제 2대대는 김종주를 중심으로 4월 13일 낙안읍성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제 3대대는 안용갑을 행동대장으로 4월 14일 벌교의 장좌리 아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등 계획을 세웠다.
낙안 출신의 유흥주와 김종주 등은 4월 13일 낙안장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집에서 태극기를 장만했다.
이들은 낙안읍성 서문 밖에서 박태문, 배윤주, 배형주, 김선제 등과 함께 오후 2시경 성 안으로 행진하며 ‘대한독립기’와 ‘조선독립기’라고 쓰인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에 모여든 군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이들은 시위 군중을 규합한 후 만세를 부르며 서문 안으로 진출하던 중 일제 헌병 노다(野田喜一) 상등병 등이 무력으로 제지하자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종주와 그 아들 김선제 등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었고, 시위 주도자들은 체포됐다.
이때 체포된 유흥주와 김종주는 징역 1년 6월, 박태문·김선제·배윤주 등은 6월의 옥고를 치렀다.
현재 낙안읍성 동문 밖에 1998년 낙안초등학교에서 이전해 와 건립한 ‘낙안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유생층 주도, 의병항쟁과 연계
낙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유생층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특히 김종주는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말 의병항쟁이 3·1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도란사’란 조직을 만들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행동대격인 ‘이팔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조직을 ‘위친계’로 가장하는 등 조직적인 운동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각 지역별로 분산해 만세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낙안 만세시위의 연계성을 확보하고 있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