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획특집> 민족의 영웅, 마라토너 남승룡 - ①

<기획특집> 민족의 영웅, 마라토너 남승룡 - ①

by 운영자 2014.10.29

순천이 낳은 마라토너 남승룡 선수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옹과 메달을 따내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희망을 던졌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는 한 시대를 올곧게 한길로 꾸준하게 달려와 우리 곁에 우뚝 선 마라토너다.

특히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굴하지 않고 꺾이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민족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주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손기정 선수가 해방 이후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받아온 반면 동메달을 받아 쥔 남승룡은 세인들의 관심 밖에서 쓸쓸한 여정을 보냈다.

그가 2001년 세상과 이별한 지 14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그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지역사회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본지는 선생의 마라톤 여정을 시작으로 남승룡 마라톤대회, 지역사회 재조명 등 3회에 걸쳐 기획보도 한다. <편집자>

마라토너 남승룡 … 순천 넘어 민족의 희망으로
“한길로 꾸준하게 달려와 우리 곁에 우뚝 서다”


글 싣는 순서
1. 마라토너 남승룡 … 순천 넘어 민족의 희망으로
2. 남승룡마라톤대회 …“순천시민과 함께, 뛰다”
3. 순천의 보물 남승룡 … 지역사회 재조명
“소년 남승룡, 달리기 시작하다”


세계적인 마라톤선수이자, 전남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남승룡은 1912년 11월 23일 저전동에서 태어났다(현재의 세광교회 주차장).

소년 남승룡은 달리고 싶고, 친구가 좋아 부모님의 강력한 서당교육을 마다하고 학교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순천공립보통학교(현 남초등) 학생 시절 외사촌형(정종호)이 운동회에서 일본인들과 경쟁, 마라톤 1위를 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마라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소년 남승룡의 운명적인 마라톤이 이렇게 시작됐다.

일본인 담임 교사인 후꾸나가의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 길로 나가 세계 최고가 되어라”는 가르침 또한 마라톤 인생이 시작되었던 결정적인 동기다.

순천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신궁대회 전라남도 대표로 출전해 1만m에서 4위를, 마라톤에서는 2위를 차지해 일찍부터 달리기에 재능을 보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협성실업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일본의 아사부[麻布] 상업학교로 전학했다. 메이지[明治]대학 재학 때는 고학을 하고 있던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일본인 귀족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마라톤에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서 동메달 거머쥐다”

청년으로 성장한 남승룡은 각종 육상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로 성장한다.

1932년 10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육상경기대회 5000m와 1만m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 해 전(全)일본 마라톤 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1935년 메이지대 2학년 때 일본건국기념 마라톤대회가 동경 시내에서 열렸는데 끼어든 자동차에 부딪쳐 부상을 입었으나 경기를 마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려 선두를 차지하였다.

1936년 제11회 올림픽 마라톤 최종예선전에서 남승룡 1위, 손기정 2위, 스즈끼 3위, 시아끼가 4위를 각각 기록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출전선수가 각 나라 당 3명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조선인 1명만을 출전시킬 속셈이었지만 마지못해 조선인 2명, 일본인 2명을 후보로 정하였다.

개막 3일 전 현지에서의 재선발전에서도 손기정 1위, 남승룡 2위, 시아끼가 3위를 차지함으로써 이들 3명이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였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56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남승룡은 2시간 31분 43초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는 후반레이스에 강했다.

반환점을 돌 때는 33위였으나 34km지점에서는 6위로 올라섰으며, 결승선 3위로 통과했다.

“마라톤 영웅,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2회 연속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해 결국 금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8·15해방 후 1947년 4월에 개최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서른여섯 살의 남승룡은 코치이자 선수로서 서윤복과 함께 출전해 10위에 올라, 우승자인 서윤복과 함께 마라톤 강국의 자존심을 살렸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그는 용산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교통부로 직장을 옮겼다.

1953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취임해 1956년 충무공정신계승 전국 마라톤 대회를 열어 전남의 마라톤을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제자로는 송길윤·김연범·김해룡 등이 있다. 1947~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60년대 말 “젊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서야 육상이 발전한다”며 체육계를 떠난 뒤 세상의 시각으로는 ‘비운의 마라토너’였던 그는 2001년 2월 20일 (향년 89세) 숙환으로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교차로신문사/ 김회진 기자 kimhj00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