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역사를 더듬다 > 순천향교

역사를 더듬다 > 순천향교

by 운영자 2016.08.19

천년 역사 살아숨쉬는 지성·문화예술의 요람
987년 고려 성종 때 창건 ‘전남유형문화재 127호’
순천 유림 470여 명 … 제례·교육 기능 담당
1000년 전, 순천의 옛 선인들의 지성 및 인성교육을 담당한 곳은 어디였을까?
현재 지역별로 공립학교가 운영되고 있듯, 당시에도 인재 양성을 위한 지방교육기관이 있었다. 바로, 향교(鄕校)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워진 것으로, 순천향교는‘고려 성종 6년(987년)에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처음 세우고 교수를 파견해 교육을 시켰다’는 기록을 통해 12목 중 하나인 순천(당시 승주목)에 세워진 학교가 그 시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천향교의 최초의 위치는 승평지에‘옛날에는 성의 동쪽 7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이후에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성의 서쪽3리’로 첫 번째 이건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수해로 인해 지난 1550년에는 성의 동쪽5리로, 1610년에는 옥천변 그전 터의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또다시 수해로 인해 1780년에 성의 남쪽 10리(홍내동)로 이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홍내동은 향교의 위치로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옛 순천부읍성이 자리한 금곡동(현 위치)으로 1801년 5차이건이 이뤄졌다.
수해에 따른 피해로 중수도 여러 번 실시됐는데 1624년과 1648년에 대홍수로 건물 담장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1648년 피해 당시 김종일 부사가 조정에 이건을 건의했지만 승인되지 않았다. 이에 김 부사는 이듬해 당시 위치에 중수를 진행했으며, 이러한 김 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김종일 부사 흥학비’가 현재 순천향교 내에 남아있다.
개인이 아닌 유림 전체가 나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일화도 있다.

이는 과거 순천 유림의 규모와 단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례로, 6.25전쟁(1950년) 이후인 1956년 건물·담장 등 대대적인 정비를 위한 모금에 2500여 명의 유림이 참여했고 당시 돈으로 1000여만 원이 모아졌다.

이후에는 유림의 위치와 역할이 점차 축소되면서 현재는 남아있는 숫자도 470여 명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성현의 제례(석전, 분향, 고유, 사직제 등)와 함께 경전 및 한문·예절 등 선비교육, 청소년 인성교육(성년례, 예절교육 등), 사회 봉사활동(원로유림 경로잔치, 전통혼례와 효행자 선발표창, 다문화가족 예절교육 등) 등 지역에서 매우 다양한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전남 지방 유형문화재 127호로 지정(1985년 2월 25일)된 순천향교는 1817평 대지에 20동(56칸)의 건물이 있으며 △대성전 정면 5칸 측면 2칸 △명륜당 정면 7칸 측면 2칸 △동재·서재 정면 5칸 측면 1칸 △동무·서무 정면 3칸 측면 1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명륜당은 옛 선비들의 주요 학습공간이었으며, 동재·서재는 기숙사로 사용됐다. 또한 대성전은 제향공간으로 전남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인 / 터 / 뷰>
순천향교 김명수 전교 “지역 인성교육에 앞장”
지난 6월 취임한 김명수(74·사진) 전교는 보다 많은 이들이 향교를 찾을 수 있도록, 향교의 진입 문턱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향교의 교육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 추진할 계획이다.

김 전교는 “최근 반인륜적인 사건·사고들로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면서 “선비문화, 체험학습 등을 통해 지역 인성교육에 앞장서고자 하며, 이것이 바로 순천향교의 비전”이라고 말했다.

[순천광양교차로 / 이보람 기자 shr55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