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역사를 더듬다>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역사를 더듬다>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by 운영자 2016.12.09

순천 출생 … 임시정부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항일전투 참여·독립군 양성 등 광복 ‘초석’ 다져
삼천리 금수강산이
일제의 총칼 아래
유린되고 신음할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니
아! 그 이름
청사(靑史·역사)에 찬란한
백강 조경한 선생이어라”

-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中 -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에 전국의 거리가 촛불로 가득한 가운데, 차가운 거리로 나선 국민들은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이처럼 뜨거워지는 것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

순천에는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과 자긍심을 잃지 않고 조국독립과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가 있다.

바로, 백강 조경한(1900~1993) 선생이다.

순천시 연향동에 자리한 금당공원에는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경한 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와 조형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는 순천시가 국가보훈처로부터 건립비를 지원받아 지난 2009년에 조성, 관리해오고 있는 현충시설이다.

추모비 등에 따르면, 구한말 순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독립운동가 송병선의 학통을 이은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애국충절의 정신을 체득했다.

그러다 3.1 운동을 목도한 선생은 1921년 스무살의 나이로 만주독립단의 국내 지하공작 연락원 활동을 시작으로, 20여 년 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1927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신채호의 지도로 독립 운동에 몸담았으며, 만주로 건너가 홍진 이청천 등과 3본주의(민본, 노본, 인본)를 표방한 한국독립당을 조직해 활약했다.

독립군을 결성한 이들은 길림자위군과 연합해 만주벌판의 쌍성보 사도하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고, 특히 대전자 대첩은 청산리대첩 못지않은 쾌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금당공원에 추모비와 함께 설치돼 있는 조형물은 이러한 대전자 전투를 형상화한 것.

해당 조형물은 전국 공모를 거쳐 선정된 양진옥 작가의 작품 ‘빛의 소리’로, 양 작가는 조경한 선생이 참여한 100여 회의 크고 작은 항일 전투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대전자 전투’ 및 선생의 애국심을 절벽에 피어나는 태극기로 형상화했다.

한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고 일본군의 강압으로 더 이상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선생은 중국 본토로 이동, 1933년 낙양(洛陽)군관학교에 특별반이 개설되자 이곳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1930~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사 저술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집필, 사회 활동 등을 펼쳐오다가 1993년 타계했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광복의 초석을 다진 선생에게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헌정했으며, 순천시는 선생을 기리고자 추모비 건립에 앞선 지난 2005년 국도 17호선 연향동 팔마체육관 사거리∼서면 선평 삼거리 8.1㎞를 선생의 아호를 따서 ‘백강로’로 명명하기도 했다.

[순천광양교차로 / 이보람 기자 shr55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