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광양의 정체성② 호국의 도시
기획-광양의 정체성② 호국의 도시
by 운영자 2017.06.05
광양 ‘역사 속 우국충절 잇는 정체성 확립 기대’
□ 글 싣는 순서
1. 개척정신이 강한 시민
2. 호국의 도시-②
3. 인물의 고장
4. 먹거리가 풍요로운 고장
5. 경제 중심도시
광양과 광양사람들의 충정과 불의에 대항한 항거정신은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매천의 ‘오하기문’과 오지영의 ‘동학사’ 등 관련 문헌 및 사료에 의하면 광양은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항쟁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당시 광양농민군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평등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항거하다가 백운산과 섬진강, 진상 섬진역, 광양 유당공원 등에서 수천 명이 죽임을 당했고, 광양에서 불에 탄 집도 1천여 채에 달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광양의 역사적 사건은 또 있다. 이도재와 한군협이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도재는 동학 접주 김개남을 전주 감영에서 즉결 처분하고, 동학지도자 전봉준을 체포, 함거에 실어 서울로 압송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의미의 이도재 애민선정비가 현재 광양읍 유당공원에 서 있어, 광양지역이 최후의 농민 항쟁지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순천의 산 사람 셋이 광양 송장 하나 못 당한다’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한 한군협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곡 접주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뒤, 광양읍 유당공원에서 사형을 당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관원을 호통쳤다는 일화로, 후손들에게 광양인의 기개와 자긍심을 안겨준 인물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광양인들의 호국정신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광양의 항일 독립 운동사(2011년)’에 따르면, 광양 출신 독립유공자(대통령 표창 이상 수상)는 2016년 말 기준 33명으로, 이는 인근 순천과 여수보다 단순히 인원만 비교해도 더 많은 숫자다.
더불어 아직까지 훈격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까지 합치면 70명 정도에 달한다는 것으로도 광양사람들의 뿌리 깊은 애국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건국훈장 독립장 등 높은 훈격을 수여 받은 국가등록 주요 독립유공자는 △황현(黃玹 1855~1910) △김응백(金應伯 1869~1910)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을 꼽을 수 있다.
너무도 유명한 구한말 탁월한 시인이자 우국지사인 황현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등을 저술한 역사 비평가로서, 한·일 병합을 당하자 통분해 하며 음독 자결·순국했다.
또, 김응백은 1908년 황병학 의병부대에 가담해 진월면 망덕항 전투에서 1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대승을 거둔 뒤, 군자금을 모집하다 망덕항 피습사건 등으로 왜경에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황병학은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진월면 망덕항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여러 차례 왜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입국하다 왜경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이렇듯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항일 독립운동 등에서 보여준 꿋꿋한 기개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우국충절의 표상이 되어준 광양 선인들의 발자취에 대해 후대의 광양 사람들은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광양 선인들이 보여준 호국의 도시 광양이라는 자긍심과 계승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의 ‘광양의 정체성’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순천광양교차로 / 김호 기자 giant1kim@hanmail.net]
1. 개척정신이 강한 시민
2. 호국의 도시-②
3. 인물의 고장
4. 먹거리가 풍요로운 고장
5. 경제 중심도시
광양과 광양사람들의 충정과 불의에 대항한 항거정신은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매천의 ‘오하기문’과 오지영의 ‘동학사’ 등 관련 문헌 및 사료에 의하면 광양은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항쟁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당시 광양농민군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평등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항거하다가 백운산과 섬진강, 진상 섬진역, 광양 유당공원 등에서 수천 명이 죽임을 당했고, 광양에서 불에 탄 집도 1천여 채에 달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광양의 역사적 사건은 또 있다. 이도재와 한군협이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도재는 동학 접주 김개남을 전주 감영에서 즉결 처분하고, 동학지도자 전봉준을 체포, 함거에 실어 서울로 압송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의미의 이도재 애민선정비가 현재 광양읍 유당공원에 서 있어, 광양지역이 최후의 농민 항쟁지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순천의 산 사람 셋이 광양 송장 하나 못 당한다’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한 한군협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곡 접주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뒤, 광양읍 유당공원에서 사형을 당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관원을 호통쳤다는 일화로, 후손들에게 광양인의 기개와 자긍심을 안겨준 인물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광양인들의 호국정신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광양의 항일 독립 운동사(2011년)’에 따르면, 광양 출신 독립유공자(대통령 표창 이상 수상)는 2016년 말 기준 33명으로, 이는 인근 순천과 여수보다 단순히 인원만 비교해도 더 많은 숫자다.
더불어 아직까지 훈격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까지 합치면 70명 정도에 달한다는 것으로도 광양사람들의 뿌리 깊은 애국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건국훈장 독립장 등 높은 훈격을 수여 받은 국가등록 주요 독립유공자는 △황현(黃玹 1855~1910) △김응백(金應伯 1869~1910)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을 꼽을 수 있다.
너무도 유명한 구한말 탁월한 시인이자 우국지사인 황현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등을 저술한 역사 비평가로서, 한·일 병합을 당하자 통분해 하며 음독 자결·순국했다.
또, 김응백은 1908년 황병학 의병부대에 가담해 진월면 망덕항 전투에서 1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대승을 거둔 뒤, 군자금을 모집하다 망덕항 피습사건 등으로 왜경에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황병학은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진월면 망덕항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여러 차례 왜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입국하다 왜경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이렇듯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항일 독립운동 등에서 보여준 꿋꿋한 기개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우국충절의 표상이 되어준 광양 선인들의 발자취에 대해 후대의 광양 사람들은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광양 선인들이 보여준 호국의 도시 광양이라는 자긍심과 계승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의 ‘광양의 정체성’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순천광양교차로 / 김호 기자 giant1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