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지리산 자락 베개 삼아 눕다

지리산 자락 베개 삼아 눕다

by 운영자 2016.06.03


구례 200년 된 고택
‘쌍산재’에서의 하룻밤


‘쌍산재’는 장수마을로 알려진 구례 상사마을에 있다. 양반가옥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하다. 좁고 작은 대문에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안으로 들어서니 안채와 건너채가 올망졸망하다. 마당도 10평 정도나 될까 아담하다.

갖가지 꽃들이 장독대에서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앵두, 초롱, 오가피, 작약, 나리꽃들과 이름 모를 꽃들이 곱다.

한옥은 자연과 교감하는 집이다. 오랜 세월 달빛에 젖고 햇빛에 빛바랜 고택의 풀 한포기,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청록이 우거진 대나무숲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올랐다. 한 사람이 걷기에 딱 좋은 돌계단이 나왔다. ‘솨~솨~’하는 대나무 소리가 청량하다. 저 멀리 까치 한마리가 날아오르자 놀란 장끼가 덩달아 퍼드득 날아오른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대나무 숲길에 자리 잡은 호서정 마루에 앉았다. 새소리가 얼마나 큰지 가슴이 쿵쿵거릴 정도였다. 책을 읽다가 큰 대(大)자로 누워 하늘을 올려보다 깜박 잠이 들어도 좋겠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발아래 떨어져 있는 붉은 동백꽃을 주워 한참을 들여다봤다. 동백은 가장 예쁠 때 후두둑 진다. 절정의 미학을 가르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목을 꺾은 동백꽃잎은 여전히 서럽도록 붉었다.

좁디좁은 오솔길 끝에 600~700평이나 되는 푸른 초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푸르고 드넓은 잔디밭에 봄 햇살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밤이 되면 이 풀밭에 달빛이 쏟아질 것이다.

쌍산재의 비밀정원은 그렇게 병풍처럼 두른 숲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나무 넝쿨을 헤치고 가니 어디선가 천자문이며 논어 왈 맹자 왈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서당 사락정이다.

서당에는 대청마루보다 높은 누마루가 있다. 아무리 진득한 학동이라도 마냥 무릎 꿇고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법. 졸리거나 발이 저릴 때 한번쯤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쭉 펴줘야 한다.

학동들은 아마도 이 누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재잘거렸을 것이고 훈장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했을 것이다.

서당을 나서 천천히 걷는데 작은 쪽문이 보였다. 열어도 되나 고개를 빼꼼 내미는데 ‘와~’ 탄성이 나왔다. 고요하면서도 푸른 저수지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림 같다. 가진 것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지식이 있어도 뽐내지 않는 선비가 저만치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듯하다. 선비는 날마다 이 조용한 호숫가를 산책하며 세상 이치를 깨달았으리라.

시골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달빛 그림자가 길어지면 새소리는 잦아들고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가 선명해진다.

지리산에도 금세 어둠이 내렸다. 방으로 들어서니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의 천장은 낮고 구들목은 따뜻하다. 창호지문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들이 쉴새없이 속삭인다.
이른 새벽 눈을 떴지만 따듯한 방바닥이 좋아 한참을 뒹굴었다.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다가 건너집 아기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사랑채 너머 당몰샘으로 나갔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려 온 이 샘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이곳 사람들은 상사마을이 전국 1위 장수마을이 된 데는 이 영험한 샘물 때문이라고 여긴다.

지리산 자락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너무 짧았지만 그 잔잔한 기쁨과 여운은 꽤 오래 갈 성싶다.

쌍산재(www.ssangsanje.com)에서 하룻밤 머물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총 6개 동인데 방은 2인실부터 있다.

한 가족이 대청마루 등 독채를 사용할 수도 있다. 가격은 1박에 8만~15만 원. 취사는 금지다.

다만 전기밥솥과 식기류가 준비되어 있어 쌀과 반찬, 컵라면 등을 가져가면 밥을 해먹을 수 있다. 오후 2시 입실해 다음날 오전 11시쯤 퇴실한다. (061)782-5179.

쌍산재 외에도 민박이 가능한 한옥은 24곳이 더 있다. 토지면에 16곳으로 가장 많다.

조선시대 부자로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무료로 나눠주던 ‘운조루(www.unjoru.net)’는 5개 동을 개방하고 있다.(061)781-2644.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의 반지 같다는 곡전재(www.gokjeonjae.com)는 5채 51칸 규모로 안채를 제외한 4채에서 민박할 수 있다. (010)5625-8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