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서리서리 서희의 한 서린 눈물이 밴 하동 평사리

서리서리 서희의 한 서린 눈물이 밴 하동 평사리

by 운영자 2005.09.30

소설 속 그곳 ∥ 소설 의 무대 하동 평사리지난 여름, 후텁지근한 더위와 눅눅하고 지루한 장마를 떠올리면 이 가을의 건조한 듯 선선한 바람과 청명한 가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 가을, 뜨거운 태양 아래, 쉼 없이 흐르는 땀 아래 미뤄두었던 책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책도 읽고, 배경이 되는 무대를 찾아가 책의 감동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가볼 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의 무대가 된 하동 악양면 평사리이다.

서희의 한 맺힌 한 마디 “찢어죽이고 말려죽일 테야”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최참판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심의 가을이야 하늘이 높아지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지리산 봉우리들 사이로 펼쳐지는 뭉게구름을 흘려보내는 하동의 가을 쪽빛 창공은 마음의 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명산 지리산과 섬진강, 거기다 한려수도까지 한 품에 싸안은 하동은 보기 드물게 복 받은 땅이다. 세 곳에서 나는 특산물을 한 곳에서 맛볼 수 있는 것도 축복이고, 산과 강 바다를 잇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니 수많은 소설의 무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대하소설 의 무대인 악양면 평사리를 찾아가는 길은 가을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자연 경관들로 인해 마음까지 여유로워진다. 길섶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와 푸른 하늘을 가르는 잠자리, 노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나무들의 몸부림, 금빛으로 익어 고개를 숙이는 들판의 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까지 하동은 차분히 가을맞이를 하고 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로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많은지 하동 곳곳에는 최참판댁 가는 표지판이 즐비하다. 따로 묻지 않고도 표지판만 보고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 구불구불 섬진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길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기분이다.

목적지인 의 무대 최참판댁도 가고, 가는 내내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도 볼 수 있기 때문. 또 길게 늘어선 벚나무들이 벌써부터 잎을 털어내고 있어 가을여행의 정취를 더한다.

하동 악양은 중국 호남성의 아름다운 고대도시 악양과 빼어나게 닮았다고 해서 생긴 명칭인데 산으로 강으로 둘러싸인 산골짝 어디에 그렇게 너른 평야가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지리산 형제봉을 우러러보며 타박타박 정겨운 돌담이 놓인 비탈진 골목을 10분쯤 걸으면 작은 언덕배기 위에 단아한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고래등같은 집이 아닌 마을의 초가와 잘 어울리는 소박하고 단아한 기와집이 바로 소설 의 주인공 서희의 집이다.

활짝 열린 빗장을 열기 전 지금껏 올라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입에서 ‘하~’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슴이 툭 트인다. 바로 아래 펼쳐진 올망졸망 초가집들,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보이는 드넓은 악양 들판, 더 멀리에는 섬진강 물결, 더 더 더 멀리에는 지리산까지. 평사리를 호령했던 윤씨 부인의 기상이, 조준구로부터 땅을 되찾으려는 서희의 서슬 퍼런 집념이 이 풍광들 사이에서는 가능했을 법하다.

최참판댁의 소슬 대문을 들어서면 동학혁명을 수군대던 머슴들의 숙소인 중간채가 가로막는다. 중간채를 통과하면 안주인 윤씨 부인의 안채, 그 왼편은 서희가 머물던 연못 달린 별당, 그 오른편은 누마루 최참판댁의 기품 넘치는 사랑채가 있다. 그 뒤로 사당과 초당….

마당 한가운데 서니, 소설 속 풍경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오간다.
엄마 찾아오라고 버둥질을 치며 우는 서희를 길상이가 업어 달래는 환청과 환상에 젖어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최참판댁 곳곳 별당과 안채, 사랑채, 사당 등에는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의 장면들과 그 중의 명대사들을 적어놓은 표지판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소설과 드라마의 장면들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또 중간채 한켠에는 서희와 갈상의 캐릭터용품과 하동의 특산물인 녹차 등을 팔고 있어 그것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 의 고향에 앉아서 그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윤씨 부인, 최치수, 서희, 길상, 구천이, 용이, 홍이, 월선이, 봉순이, 귀녀, 평산이, 조준구, 강포수, 환국, 윤국, 양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족과 핏줄, 흙, 정, 그리고 한(恨) 인 그들의 인생이, 삶이 흘러감을 가슴 아리게 느끼면서….

취재 : 최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