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느리고 깊은 길, 보성 득량만 해안도로를 따라

느리고 깊은 길, 보성 득량만 해안도로를 따라

by 운영자 2006.06.30

여름이 깊어지고 있다.
탁 트인 곳이 절로 생각나고, 어디론가 무작정 달려가고 싶어진다.

이 여름을 만끽하며 달릴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다를 길옆에 두고 길게 이어지는 곳.
보성 득량면에서 회천면을 잇는 득량만 해안도로가 바로 그곳이다.

그 길 위에 서면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르고, 사람은 누구나 저절로 여유로워질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가속페달 위의 발에 힙이 더해지지 않는다.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기에 속도를 낼 수 없는 까닭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길을 지나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잔잔한 풍경들 때문이다.

도로를 경계로 한쪽은 소나무와 크고 작은 잡목들이 어우러져 긴 숲을 이루고, 다른 한쪽은 고즈넉한 바다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한적하고 편안한 모습들.
도시에서처럼 조급함이 밀려들 리 없다.

탁 트인 바다에서, 푸른 녹차밭에서 삶의 의지 수혈 받다

순천·광양에서 보성, 참 가까운 거리인데도 득량만 해안도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길, 가슴이 시원해지는 득량만 해안도로를 안내한다.

우선 보성 방면 2번 국도를 타고 한 30분 시원하게 달리자. 그러다 보면 왼편으로 득량농협주유소가 보이고 ‘보성 율포·보성 차밭’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3분 정도만 들어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때 왼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리고 3분 가량 직진, 다시 ‘득량·회천’ 방면 이정표를 따라 오른편으로 돌면 그 길부터는 이정표와는 멀어져도 된다.

둥그스름한 산자락과 감자와 옥수수, 쪽파가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 밭, 넓고 깊은 바다가 보이는 길만 쭉 따라가면 그곳이 바로 득량만 해안도로다.

득량·회천 가는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바다는 왠지 조금 더 특별하다.

여름의 시원함과 넓고 긴 바다 는 물론이고 바다에 기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땀 내음이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 고개 넘어 돌아서면 해변 마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마을, 마을. 삶의 냄새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 수 있는 향기가 있을까.

득량만 방조제에서 율포까지는 약 30km. 845번 지방도는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고흥반도를 마주보고 있다. 바다와 땅에 골고루 의존해가며 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널따란 바다를 왼쪽에 끼고, 푸른 밭을 오른쪽에 끼고 회천에서 득량 방면으로 한 15분쯤 달렸을까. ‘비봉공룡화석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온다. 시간을 거슬러 공룡이 살던 8,300만년 전 백악기로 여행을 한다.

사람이 미처 생기기 전, 상상조차 잘 안 되는 아주 까마득한 먼 일이다. 한반도는 공룡의 주된 생활지였다고 한다. 이곳 비봉리에서 대규모로 발견된 공룡알과 공룡알 둥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비봉리 화석지는 세계에서 단일 규모상 최대의 공룡알 화석지이다.

비봉리는 공룡화석지 말고도 또 다른 역사를 품고 있다.
비봉리 선소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부대가 왜군과 전투 중 식량이 떨어져 고민하다 이곳에서 군량미를 조달하여 왜구를 무찌를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식량을 얻은 곳’이라는 뜻의 득량(得糧)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비봉리 공룡화석지를 나와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는다.
득량·회천 해안도로는 유난히도 바위가 많다.

그것도 자그마한 바위가 아니라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바위가. 사람들은 그 바위를 일부러 치우려고 하지 않은 모양이다.

바위들 모두 밭 한가운데, 집 옆에 너무도 위풍당당하게 자라 잡고 있다.
사는 곳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가 참 자연스러운 곳, 득량만 해안도로다.

한참을 달리니 율포해수욕장이 보인다.
한여름 피서 인파로 붐빌 이곳이 개장 전이라서인지 한가하다.

연인들 몇 상이 소곤거릴 뿐이다.
율포해수욕장은 열흘 앞으로 다가온 개장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율포를 끼고 돌아 18번 국도를 타고 녹차밭으로 향한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은 어느 것이 녹차밭이고 어느 것이 그냥 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푸르다.

산등성이 모양대로 구불구불 잘 정돈된 녹차밭에서 은은한 녹차향이 나는 것 같다. 6월의 햇살을 받은 녹차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시동을 켜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출발이다. 늘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아 무거웠던 마음이, 더위에 헐떡이며 지치고 무거워진 몸이 바다의 시원한 기운 받아, 공룡의 우렁찬 숨결 받아, 녹차의 푸른 향 호흡해 다시 가벼워진 느낌이다.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달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빠르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취재 : 최명희 기자

사진설명
1. 세상의 소리가 모두 바닷속에 묻힌 것만 같은 느리고 깊은 길이다
2. 좌바다 우들판. 좌청룡 우백호보다 더 든든하다
3. 6월 햇살 받아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리는 녹차밭. 그곳에 가면 콧구멍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쉬자. 푸름을 빨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