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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울창창 나무들에 갇히다, 장성 축령산 삼나무ㆍ편백나무 숲

울울창창 나무들에 갇히다, 장성 축령산 삼나무ㆍ편백나무 숲

by 운영자 2006.09.01

울울창창 나무들에 갇히다, 장성 축령산 삼나무ㆍ편백나무 숲

지쳤다. 질렸다. 이 두 마디면 올 여름을 표현하기에 딱 적합할 것 같다.

여름에게 완전 지쳤고, 질려버렸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뿐은 아니리라. 도통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던 지긋지긋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을 호출하는 비가 내렸다.

대기는 일순 차가워졌고, 풍만한 가을걷이를 위한 촉진제를 맞은 식물들은 열심히 열매를 키운다. 만삭의 가을을 품을 채비를 마친 산하가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초록빛을 내뿜는 이때.

그 마지막 초록빛 맞으러 숲을 찾았다. 장성 서삼면 모임리와 북일면 문임리 일대를 뒤덮고 있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들, 울창함을 거뜬히 넘어 빽빽한 그 숲. 장성 축령산 삼나무ㆍ편백나무 숲이다.

나무들 들어찬 오솔길을 가만가만 걷다 보면…

숲은 사계절 내내 경이롭다.
봄의 숲이 천지간에 향긋한 아카시아 향을 내뿜으면, 여름 숲은 초록에 초록을 더하며 둥글게 부푼다.
여름 내내 내리쬐던 폭염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지쳐 쓰러질 무렵 숲은 붉은 열꽃을 피운다. 그 열꽃을 이기지 못해 하나하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에 맑고 찬 서리가 내리면 그때부터 겨울 숲이 시작된다.

꼿꼿한 상록수가 한파를 견디는 동안 깊은 숲의 계곡 물은 두꺼운 얼음장 아래서 흐르고 또 흘러 다시 봄 숲의 심장으로 닿는다.

이 무렵의 숲은 어떤 모습일까?
아직 열꽃이 피지는 않았을 테고, 마지막 초록 몸부림을 하고 있겠지?

그 고통스런 그러나 아름다운 몸부림 보러 떠난다.
삼나무 편백나무 울창한 장성 축령산으로.

축령산의 삼나무·편백나무 숲은 장엄하다. 그래, 장엄하다는 말이 정확할 것 같다.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듯한 기세로 곧게 자라나 성벽 같은 숲을 이루었다.

그 끝이 어디인가 헤아려 보기 위해 고개를 젖히면 목이 아플 정도다.
평균 높이가 18m이니, 2m도 채 못되는 인간은 그 속에 갇히기 십상이다.

30~50년 수령의 나무들은 약 3,000평에 700~2,500그루의 밀도로 심겨 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생김새가 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쉽지 않으나 잎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뭇잎이 부챗살처럼 펴진 것이 편백, 솔방울처럼 뭉친 것이 삼나무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수령 50년의 아름드리 나무도 한때는 작은 묘목이었을 것이고, 그 묘목을 심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축령산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는 나무에 생을 걸었던 한 사람의 열정이 근간이 되었으니, 숲길 한가운데 세워진 공적비의 주인공인 작고한 임종국 씨가 그 주인공이다.

벌거숭이 땅에 1956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해 87년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그 나무들만 생각했다는 사람. 선생은 자신의 땅도 아닌 국유지에 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이 곧게 자랄 수 있도록 했다. 가뭄에 말라가는 나무들을 살리기 위해 물지게를 지고 다니며 그 많은 나무에 일일이 물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 그 나무들은 선생의 것이 아니었다.
나무 심는 일에 모든 가산을 내어주고도 그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선생은 다 자란 나무를 담보로 빚을 얻어 계속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선생에게는 자식 같았던 그 나무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숲이 영원히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에게 그 숲을 넘겨받은 사람들도 차마 그 나무들을 목재로 팔아넘기지 못하고 산림청에 건의해 보존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누어 가졌던 그 숲이 이제는 산림청의 소유다.

시간이 지나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하늘 가까이 자랐고,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90만 평의 인공 조림지는 우리나라 전체를 통 털어 가장 아름답다는 숲이 되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비집고 길게 이어지는 황톳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숲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 깊이는 단지 사람이 걷고 있는 거리의 개념이 아니다. 그 숲에 머물고 있는 아주 오래된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깊이는 숲이 만들어내는 풋풋한 향기와 함께 사람의 코끝으로 전달돼 맑은 기운으로 몸속에 차오른다. 축령산 삼나무 편백나무 숲은 깊은 심호흡 한 번만으로도 그렇게 삶의 재충전을 시켜준다.

편백나무가 내뿜는 청신한 피톤치드 속에 오솔길을 가만가만 걷다 보면, 밤송이 벌어지듯 ‘툭’하고 마음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사람들은 축령산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에 기대어 삶의 위안을 찾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숲을 통해 얻은 만큼의 행복을 임종국 선생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최명희 기자 - yurial78@naver.com]

★ Tip> 호남고속도로 장성나들목을 나와 1번 국도를 이용한다. 10㎞쯤 진행하면 898번 지방도가 나오는데 여기서 고창 쪽으로 좌회전, 광암마을을 지난 후 금곡마을(영화촌) 팻말을 보고 다시 좌회전한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2㎞쯤 올라가면 금곡마을이다.

여기서 축령산 숲을 한 바퀴 돌아오는 데는 쉬엄쉬엄 걷더라도 왕복 2시간 가량 소요된다. 잘 닦여진 임도를 따라 반대편 길로 넘어가면 장성 서삼면 추암리 백련동이다. 근처에 필암서원과 동학혁명기념탑이 있어 역사기행코스로 제격이다.

사진설명
1. 근위병처럼 들어선 나무들
2. 장성 축령산, 녹음에 완전히 포위당했다
3.금곡영화마을 입구의 장승과 솟대
4. 축령산 바로 옆에 위치한 금곡영화마을.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이 촬영된 고향 내음 가득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