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저무는 가을 붙잡으러, 해남 두륜산

저무는 가을 붙잡으러, 해남 두륜산

by 운영자 2006.11.10

색(色)을 거두고 가을을 말할 수 있을까. 넘실대는 ‘황금’ 들녘, 생의 마지막 ‘붉은’ ‘노란’ 울음 토해내는 이파리. 황금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룬 가을은 여느 계절보다 보드랍다.

봄이 저 아래 남도에서부터 온다면 가을은 저 북녘의 설악산에서 소백산을 넘어 남도의 산하까지 위에서부터 서서히 물들인다. 가는 가을 아쉬워, 남도 끝 해남으로 가을 붙잡으러 떠난다.

붉게 물든 단풍잎 서리 맞아 곱고, 노란 은행잎 이슬 젖어 더욱 맑다. 사람 손 닿지 않아도 ‘그렇게’ 빚어내는 천상의 조화. 가을이 옴팡지게 머물러 있는 가을산으로 떠난다.

심장마저도 불타버릴 것 같고, 심지어 길바닥과 하늘까지도 붉게 물들어버릴 것 같은 황홀한 가을, 해남 두륜산으로 간다.
‘붉은’ 울음이 타는 ‘숲’에서 가을을 만나다

노랗게 물든 황금들녘이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추수가 끝난 논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가을의 끝자락, 노랗게 익어가는 은행잎과 붉게 타들어가는 단풍 이파리가 빈 마음을 채운다.

고즈넉한 산사, 왁자한 등산객들의 소음까지도 붉은 단풍나무와 더불어 아름다운 선율로 화한다. 부지런한 다람쥐는 벌써 겨울을 준비하나 보다. 낙엽을 헤치며 먹이 줍기에 열심이다.

멀어지는 가을. 늦깎이 가을 향기를 오래오래 맡고 싶다. 늦게 찾아온 기쁨이 그만큼 늦게 떠나가듯이….
벌교, 보성, 장흥, 강진을 지나 해남읍에 접어든다. 두륜산 대흥사 표지판을 보고 얼마나 달렸을까. 가는 가을 아쉬워 붙잡으러 온 인파들로 주차장이 복작댄다. 등산화 끈 질끈 묶고, 흰 장갑 단단히 끼고 가을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친다. 멀리 두륜산을 올려다본다. 품이 참 넓다. ‘두륜(頭輪)’이라는 이름처럼 산꼭대기가 둥그스름해 더 넉넉해 보인다.

두륜산을 즐기는 데는 4개의 코스가 있는데, 그 중 두륜산 일주 코스로 알찰 뿐만 아니라 초보자들도 무난히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주차장을 기점으로 대흥사 ~ 북암 ~ 만일암터 ~ 헬기장 ~ 두륜봉 ~ 진불암 ~ 대흥사, 다시 주차장의 왕복 7km, 약 3시간 코스를 권한다. 산행이 어렵다면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차장에서 대흥사 입구까지는 그야말로 단풍 터널이다. 이것만으로도 가을은 다 즐겼다 싶을 정도다. 단풍나무뿐만 아니라 벚나무, 전나무, 소나무, 삼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져 있어 콧구멍 벌름거리며 온 팔 벌려 나무 기운 받아들이기에 딱 좋다. 두고두고 오래오래 걷고 싶은 길이다. 그 길을 지나 대흥사 피안교를 건너면 동백숲과 거목들에 둘러싸인 대흥사 경내로 들게 된다. 대흥사 경내에 들어 고개를 들고 산을 보니 숲은 가을빛으로 번져 빛나고 있었다.

붉고 붉어져 가고 노래져 가고 아직 푸른 기운 도는 나무들까지 섞여 오묘한 빛깔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도 이리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픈 마음에 걸음이 빨라진다. 북암으로 오르려면 서산대사유물전시관 부근의 표충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북암까지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 1Km가 두륜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숲은커녕 나무도 안 보아고 오직 먼지 폴폴 나는 숲길과 그 먼지 뽀얗게 앉은 내 등산화만 보일 뿐.

동백숲으로 싸인 북암에서 만일암터로 가는 등산로는 암벽 아래에 비스듬히 길이 나 있는데, 너럭바위가 깔린 이 길은 풍광이 그만이다. 수도승들이 지내던 금강골을 지나자 천연 노거수가 나타난다.

어른 대여섯 명이 팔을 연결해야 할 정도로 굵은 고목으로, 이 고목 바로 위에 만일암터가 있다. 5층 석탑만이 남아 있는 만일암터는 석간수가 일품. 또 두륜산 정상인 가련봉 일대의 기암 풍치가 압권이다.
노적가리를 연상시키는 암봉들이 도열한 모습은 천연의 조각 전시장 같기도 하다. 바람이 분다. 가을숲이 흔들거리고 있다. 가을로 깊어져 가는 마음 전해주고 있다. 만일암터를 벗어나 두륜봉 쪽 길로 접어들면 갈림길목이 나온다. 두륜봉(0.76Km) 길을 택해 헬기장에 이른다. 이곳 헬기장 왼쪽에 송곳처럼 솟은 봉이 정상인 가련봉이다.

헬기장에서 두륜봉 가는 길은 바다 쪽으로 비탈져있다. 가파른 경사여서 철책을 설치해두었다. 하지만 구름다리 아래 부분을 올라설 때는 쭈뼛쭈뼛 겁이 난다.

무서워 발아래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눈앞에 펼쳐진 다도해 풍경에 말문을 잃는다.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펼쳐진 억새와 흔들흔들 구름다리의 아찔함도 잊을 만큼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 구름다리 아래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본다.

구름다리를 지나 올라서면 곧바로 평평한 암반지대로, 두륜봉 정상인 백운대다. 백운대에서는 대흥사가 한눈에 드러나고 멀리 완도와 자그마한 섬들이 수석처럼 펼쳐진 풍경이 그림인 듯 까무룩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두륜봉에서 진불암 가는 길은 바위 틈 사이로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울창한 숲길을 20여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진불암은 무척 단아하다. 산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

다시 대흥사를 지난다. 가을의 막바지 정염 불태우는 잎들이 바람에 몸둘 바를 모르고, 산새소리, 물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가슴속에 묵은 찌꺼기들을 흩어놓는다. 가을 보러 왔다가 마음 속 찌꺼기까지 훌훌 털어버리게 하는, 참 좋은 가을 산이다. 참 좋은 가을이다.

[최명희 기자 - yurial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