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내 새끼들 왔는가” 버선발로 맞을 할머니네 고샅길 같은 담양 창평 한옥마을
“오메, 내 새끼들 왔는가” 버선발로 맞을 할머니네 고샅길 같은 담양 창평 한옥마을
by 운영자 2006.12.22
다르다.
담양 창평의 한옥마을은 전주의 그것과 다르다.
전주가 고풍스런 마님의 한옥 같다면 창평은 20여년 전 내가 살던 할머니네 한옥 같다.
정갈하고 단정해 돌쇠와 삼월이의 쓸고 닦는 노고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 전주 한옥마을이라면 창평은 마당 한가운데 고추 널고,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달구새끼 하릴없이 땅을 쪼아대던 할머니네 집 같다.
편안하고, 푸근해 절로 숨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오메, 내 새깽이들 왔는가. 어서 오소. 어서 와!” 고샅길까지 버선발로 뛰어와 손을 잡아줄 것 같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곳, 담양 창평 한옥마을.
지금 이곳은 겨울 냄새가 물씬 난다.
황량한 들녘에는 지난 주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군데군데 쌓여 있고, 저녁나절에는 밥 짓는 연기가 폴폴 올라와 나른하다. 한옥마을에서 맞는 눈 그리고 겨울은...
담양 창평의 한옥마을은 전주의 그것과 다르다.
전주가 고풍스런 마님의 한옥 같다면 창평은 20여년 전 내가 살던 할머니네 한옥 같다.
정갈하고 단정해 돌쇠와 삼월이의 쓸고 닦는 노고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 전주 한옥마을이라면 창평은 마당 한가운데 고추 널고,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달구새끼 하릴없이 땅을 쪼아대던 할머니네 집 같다.
편안하고, 푸근해 절로 숨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오메, 내 새깽이들 왔는가. 어서 오소. 어서 와!” 고샅길까지 버선발로 뛰어와 손을 잡아줄 것 같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곳, 담양 창평 한옥마을.
지금 이곳은 겨울 냄새가 물씬 난다.
황량한 들녘에는 지난 주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군데군데 쌓여 있고, 저녁나절에는 밥 짓는 연기가 폴폴 올라와 나른하다. 한옥마을에서 맞는 눈 그리고 겨울은...
돌담길 너머, 맞배지붕 건너 도란도란 삶이 흐르고
황량한 겨울 들녘에 사뿐히 눈이 내렸다. 옴팡지게 내렸으니 ‘사뿐히’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눈의 무게는 왠지 솜털 무게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축사가 무너진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호되게 나무라실 테지만. 군데군데 눈 덮인 창평의 들녘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창평(昌平)’이라는 마을 이름도 ‘너른 들’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황량한 겨울 들녘에 사뿐히 눈이 내렸다. 옴팡지게 내렸으니 ‘사뿐히’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눈의 무게는 왠지 솜털 무게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축사가 무너진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호되게 나무라실 테지만. 군데군데 눈 덮인 창평의 들녘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창평(昌平)’이라는 마을 이름도 ‘너른 들’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창평은 현재, 행정구역상 전남 담양군에 속한 ‘면(面)’에 불과하지만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담양보다도 규모가 크고, 유구한 전통의 뿌리 깊은 고을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김천일 등과 함께 남도의 손꼽히는 의병장으로 알려진 고경명도 엄밀히 말해서 창평을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김천일 등과 함께 남도의 손꼽히는 의병장으로 알려진 고경명도 엄밀히 말해서 창평을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
창평 나들목을 지나 면사무소 뒷길부터가 한옥마을의 시작점이다.
마을 이름은 삼지천 마을. 차를 두고 걷는다. ‘에게, 뭐 이래!’ ‘우리 시골하고 똑같잖아!’ 더러는 실망의 소리가 터져나올 법도 한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푸근한 돌담길이 보인다.
뱀이 유영하듯 구불구불,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울퉁불퉁 제각각인 돌들은 흙과 뒤엉켜 서로 모자란 부분은 채워주며 차곡차곡 덧쌓인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이 묻어나는 담이다.
마을 이름은 삼지천 마을. 차를 두고 걷는다. ‘에게, 뭐 이래!’ ‘우리 시골하고 똑같잖아!’ 더러는 실망의 소리가 터져나올 법도 한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푸근한 돌담길이 보인다.
뱀이 유영하듯 구불구불,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울퉁불퉁 제각각인 돌들은 흙과 뒤엉켜 서로 모자란 부분은 채워주며 차곡차곡 덧쌓인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이 묻어나는 담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돌담장 안으로 살포시 보이는 올망졸망 장독대도 보이고, 손님상 치르던 교자상도 보인다. 장에서 ‘5000원, 5000원’해대는 통에, 별량댁이 주머니만 만지작 만지작거리게 했던 털 달린 고무신도 보이고, 장에 갈 때도 입으시고, 면사무소 일 보러 갈 때도 입으시는 할아버지의 외출용 ‘털잠바’도 보인다.
아마도 이 낮은 돌담장 위로 동네 아낙들은 나물이며, 손수 만든 그들의 속 깊은 인정을 주고받았을 것이고 꼬마 녀석들은 돌담 모퉁이마다 숨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수없이 외쳐대며 숨바꼭질에 해 지는 줄 몰랐을 것이다.
들어서는 입구에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듯 16세기 초에 형성된 이 마을은 500여년의 역사가 곳곳의 고가에서 묻어나온다.
특히 고씨 집성촌 마을로 이중 고재선 가옥과 고재환 가옥은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고건축물들이 남도 주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 낮은 돌담장 위로 동네 아낙들은 나물이며, 손수 만든 그들의 속 깊은 인정을 주고받았을 것이고 꼬마 녀석들은 돌담 모퉁이마다 숨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수없이 외쳐대며 숨바꼭질에 해 지는 줄 몰랐을 것이다.
들어서는 입구에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듯 16세기 초에 형성된 이 마을은 500여년의 역사가 곳곳의 고가에서 묻어나온다.
특히 고씨 집성촌 마을로 이중 고재선 가옥과 고재환 가옥은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고건축물들이 남도 주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돌담길을 걸어 고재선 가옥을 둘러봤다.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가옥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문간채등 전통적인 상류층의 주택 모습을 잘 간직한 것으로 1915년경에 원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었다.
대문은 3칸으로 중앙 칸이 평대문으로 되어있고 좌우에 방이 1칸씩 구성된 맞배지붕(측면이 八자 모양인 지붕)이다. 가운데 칸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종 나무들과 집의 동북쪽에서 수로를 끌어들여 만든 연못으로 구성된 사랑마당이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一字形)으로 우측 끝에 2칸의 넓은 마루를 두어 이 지방의 전통적인 평면구성 수법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담으로 막혀있고 중문(中門)이 마련되어 있으며, 안채 역시 일자형의 평면이다. 이 가옥은 전통적인 남부지방 전통주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어있는 집이라 관리가 허술하고, 마당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땅이 푸석거리고,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사람이나 집이나 사랑이 부족하면 기력을 잃는가 보다.
대문은 3칸으로 중앙 칸이 평대문으로 되어있고 좌우에 방이 1칸씩 구성된 맞배지붕(측면이 八자 모양인 지붕)이다. 가운데 칸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종 나무들과 집의 동북쪽에서 수로를 끌어들여 만든 연못으로 구성된 사랑마당이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一字形)으로 우측 끝에 2칸의 넓은 마루를 두어 이 지방의 전통적인 평면구성 수법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담으로 막혀있고 중문(中門)이 마련되어 있으며, 안채 역시 일자형의 평면이다. 이 가옥은 전통적인 남부지방 전통주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어있는 집이라 관리가 허술하고, 마당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땅이 푸석거리고,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사람이나 집이나 사랑이 부족하면 기력을 잃는가 보다.
고재환 가옥은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37호로 1925년에 건립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대농가옥이다. 전통 양반 가옥이 갖추어야 할 다양한 채의 조합형식을 두루 유지하고 있다.
흔히 사랑채와 곡간, 문간은 있으나 별도의 사랑채와 삼간채, 욕실, 화장실 등이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데 고재환 가옥의 경우 이 모두를 갖추고 있다.
가옥의 전체 구조는 안채 앞으로 화단과 담장으로 구별하여 사랑채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삼칸채를 배치하였다. 고재환 가옥은 남부지방의 여느 양반집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지고 보존 상태 역시 우수하다. 뼈대가 굵고 치목이 잘 되어 있으며 짜임이 건실하여 전통목조 건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몇 군데 더 둘러보았지만 대부분 방치되어, 집이 많이 헐고 문풍지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할머니집이 그러한 듯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쇠락한 종가의 말로가 이런 것일까?
[최명희 기자 yurial78@naver.com]
흔히 사랑채와 곡간, 문간은 있으나 별도의 사랑채와 삼간채, 욕실, 화장실 등이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데 고재환 가옥의 경우 이 모두를 갖추고 있다.
가옥의 전체 구조는 안채 앞으로 화단과 담장으로 구별하여 사랑채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삼칸채를 배치하였다. 고재환 가옥은 남부지방의 여느 양반집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지고 보존 상태 역시 우수하다. 뼈대가 굵고 치목이 잘 되어 있으며 짜임이 건실하여 전통목조 건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몇 군데 더 둘러보았지만 대부분 방치되어, 집이 많이 헐고 문풍지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할머니집이 그러한 듯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쇠락한 종가의 말로가 이런 것일까?
[최명희 기자 yurial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