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돌’의 노래를 들어라, 고창 고인돌과 모양성

‘돌’의 노래를 들어라, 고창 고인돌과 모양성

by 순광교차로 2007.04.20


수천년 역사 간직한 ‘돌’의 노래를 들어라

“‘손때가 묻다’ ‘손길이 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그저 나에게 잘 맞게 길들여졌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함께하며 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얼레빗에는 할머니의 역사가 담겨있듯이.

고창에서 만난 ‘돌’들도 수천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의 모진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평범한 이 돌들에게서 수많은 선조들의 피 끓는 아우성이 들린다.”

예기치 못했던 것은 한편 당혹스럽지만 또 한편 반갑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와 우연히 길에서 만난다든가 장난삼아 산 로또가 당첨된다든가 하면 깜짝 놀라는 것은 잠시, 반갑고 기뻐 폴짝폴짝 뛸 지경이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외의 너무 멋진 장소를 발견하거나 맛있는 집을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곳 고인돌유적지가 바로 그랬다.

돌무덤 고인돌공원이 무에 그리 볼 것이 있겠느냐며 애초 여행 계획에 끼워 넣지도 않았다. 헌데 선운사 가는 길 만난 고인돌유적은 일단 그 많은 수와 넓은 분포도에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무슨 돌들이 저렇게 많이도 있을까 했을 것이다. 아산면과 고창읍, 평평하고 너른 들에는 일일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고인돌이 ‘널려 있다’.

수천년 동안 묵묵히 역사 간직한 고인돌
2000년 12월, 화순·강화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고인돌유적지는 이곳만도 약 50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고 고창 전역에 걸쳐 200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 추정된다.

선사시대의 무덤 양식인 고인돌은 유독 평야지대인 호남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는 이곳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온후한 기후와 평탄한 땅, 풍부한 먹을거리는 자연에 의지해 살던 그들에게 참 ‘살만한 땅’이었을 터.

고창 고인돌은 남방형이나 북방형 등 어린시절 배웠던 고인돌의 양식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양식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짬뽕’으로 분포한다.

북방형인 탁자식과 지상석곽형, 남방식인 바둑판형과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축조 양식이 고창 고인돌 유적의 독특한 특징이다.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릉에 산책로를 내고 잔디를 심어 만든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평범한 돌이 죽은 이들의 무덤이 되어 수천년 역사를 간직했구나’. 발소리를 낮춰 가만 땅에 귀를 대보니 비바람과 눈보라 맞으며 묵묵히 후손들을 지켜보았을 ‘돌’들이 쏟아내는 이 땅의 역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우리 고을은 우리가 지킨다’ 모양성
고창읍의 모양성 역시 ‘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곳이다.
조선 단종(1453년) 때 왜구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세워진 모양성은 아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나르면 남정네들이 단단하게 쌓아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평상시에는 관아 구실을 한 모양성은 전쟁이 나면 전 고을민들이 이 성 안으로 들어와 살면서 적과 싸웠다.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성곽인 모양성은 아직도 둘레 1.6km에 달하는 성곽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해 찾는 이들이 꾸준히 발길을 잇는 이곳은 성을 돌 때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 번 돌아야 하고,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야 제대로 답성놀이를 한 것이다.

성곽을 따라 걷는다. 소나무 숲과 대나무밭을 지나고 개나리, 벚꽃이 발아래서 반짝인다.
성곽 아래 고창의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따뜻한 봄 햇살이 곱다.

우리 것 지키기 위해 왜구에 맞서 분연히 싸웠던 이들의 붉은 함성이 바람결에 날린다.

<글ㆍ사진 : 순천광양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icro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