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역사를 따라 ‘소삭소삭’ 걷다
하동, 역사를 따라 ‘소삭소삭’ 걷다
by 순광교차로 2007.06.08
200여년 역사 간직한 하동송림, 하동읍성
하동 송림과 읍성은 몇 백 년 하동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발길이 닿은 곳,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그곳에는 바람결에도 사람들의 소란거림이 들린다. 몇 백 년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작은 울림이 느껴진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새것’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이 ‘너 이거 새로 샀어?’ 하고 물으면 ‘있었던 건데…’ 하며 말끝을 흐리기 일쑤였다. 새 운동화를 사도 집에서 동네에서 며칠씩 신다가 학교에 신고 가곤 했고, 새 옷을 사도 집에서 몇 번 입고 빨래를 해 새것 티를 없애고서야 밖에 입고 나갔다.
하동 송림과 읍성은 몇 백 년 하동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발길이 닿은 곳,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그곳에는 바람결에도 사람들의 소란거림이 들린다. 몇 백 년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작은 울림이 느껴진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새것’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이 ‘너 이거 새로 샀어?’ 하고 물으면 ‘있었던 건데…’ 하며 말끝을 흐리기 일쑤였다. 새 운동화를 사도 집에서 동네에서 며칠씩 신다가 학교에 신고 가곤 했고, 새 옷을 사도 집에서 몇 번 입고 빨래를 해 새것 티를 없애고서야 밖에 입고 나갔다.
- 사진 200여년 역사 간직한 하동송림.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들은 나라 지키는 군인처럼 든든하게 들어서 하동사람들을 매서운 바람과 강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지금은 하동의 푸른 허파 역을 톡톡히 해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새것을 부끄러워했던 이유는 ‘새것’에는 ‘내 것’이라는 소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내 냄새를 묻히고 내 몸에 길들여 비로소 ‘내 것’이라는 소유감이 든 다음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성향은 여행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디를 가도 항상 새단장된 곳보다는 오래된 곳이 좋다.
다른 이들의 발자취가 길이 된 곳, 다른 이들의 손길이 반질반질 난 곳 말이다. 하동 송림과 읍성은 그런 곳이다. 몇 백 년 하동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발길이 닿은 곳,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그곳에는 바람결에도 사람들의 소란거림이 들린다. 몇 백 년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작은 울림이 느껴진다. 섬진강 따라 논길 따라 하동의 역사를 따라 걷는다. 이 길에, 혼자라면 책 한권을 가족과 함께라면 김밥, 샌드위치 등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소나무와 섬진강의 어울림, 하동송림
하동읍에 자리한 하동송림은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다. 200살이 넘었지만 20대 청년처럼 건장한 울울창창 소나무들과 새근새근 자는 갓난아기처럼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흐르는 섬진강, 그 사이 햇발에 반짝이는 백사장이 편안한 조화를 이루는 곳.
허나 이곳을 그저 휴식공간만으로 얕봐서는 안 된다. 이곳은 200여년이 넘은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1745년(영조 21)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을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심은 소나무는 그 수만도 800여 그루에 이른다. 면적 2만6000㎡ 길이 약 2km에 심어진 이 소나무는 바람과 모래를 막아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심었던 목적 탓인지 나라 지키는 군인처럼 듬직하다.
숲 곳곳에 자리한 벤치에는 연인,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이 도란도란 망중한을 즐기고 있고, 섬진강을 행해 난 벤치도 빈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빼곡하다. 하동송림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까운 쉼터가 되어 주고, 매연으로 찌든 도시에서 녹색 허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널찍한 주차장 왼편에 길게 이어진 소나무숲 맨 끝에는 하상정(河上亭)이라는 궁도장이 있는데 말만 잘하면 직접 활을 쏴볼 수도 있다.
되살려야 할, 하동읍성
내가 ‘읍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창읍성 때문이다. 그 규모와 짜임새 있는 모양은 어느 문화유산보다 아름다웠다. 하동읍성 역시 잘 보존돼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동의 한 할인점에서부터 무너졌다. 하동읍성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주민의 말은 읍성이 잘 보존돼 있지 않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다.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했던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돼 일부가 소실되긴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헌데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철거됐다.
축성 후 287년 동안 하동을 지켜온 읍성은 결국 일본에 의해 사라져 성곽을 이뤘던 돌들 몇 개만 겨우 그 자리를 지키며 읍성이 있었던 ‘증거’가 되고 있다. 스러진 하동읍성을 보며 씁쓸했던 것은 우리 문화를 깨끗이 지우려했던 일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고, 저 읍성 돌은 사람들이 다 주서가삐리고 없어” 하시며 아쉬워하시던 한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오히려 뿔뿔이 나눠, 지금은 그 쓰임새조차도 모르는 꼴이라니…. 부끄럽고 민망할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새것을 부끄러워했던 이유는 ‘새것’에는 ‘내 것’이라는 소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내 냄새를 묻히고 내 몸에 길들여 비로소 ‘내 것’이라는 소유감이 든 다음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성향은 여행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디를 가도 항상 새단장된 곳보다는 오래된 곳이 좋다.
다른 이들의 발자취가 길이 된 곳, 다른 이들의 손길이 반질반질 난 곳 말이다. 하동 송림과 읍성은 그런 곳이다. 몇 백 년 하동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발길이 닿은 곳,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그곳에는 바람결에도 사람들의 소란거림이 들린다. 몇 백 년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작은 울림이 느껴진다. 섬진강 따라 논길 따라 하동의 역사를 따라 걷는다. 이 길에, 혼자라면 책 한권을 가족과 함께라면 김밥, 샌드위치 등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소나무와 섬진강의 어울림, 하동송림
하동읍에 자리한 하동송림은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다. 200살이 넘었지만 20대 청년처럼 건장한 울울창창 소나무들과 새근새근 자는 갓난아기처럼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흐르는 섬진강, 그 사이 햇발에 반짝이는 백사장이 편안한 조화를 이루는 곳.
허나 이곳을 그저 휴식공간만으로 얕봐서는 안 된다. 이곳은 200여년이 넘은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1745년(영조 21)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을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심은 소나무는 그 수만도 800여 그루에 이른다. 면적 2만6000㎡ 길이 약 2km에 심어진 이 소나무는 바람과 모래를 막아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심었던 목적 탓인지 나라 지키는 군인처럼 듬직하다.
숲 곳곳에 자리한 벤치에는 연인,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이 도란도란 망중한을 즐기고 있고, 섬진강을 행해 난 벤치도 빈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빼곡하다. 하동송림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까운 쉼터가 되어 주고, 매연으로 찌든 도시에서 녹색 허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널찍한 주차장 왼편에 길게 이어진 소나무숲 맨 끝에는 하상정(河上亭)이라는 궁도장이 있는데 말만 잘하면 직접 활을 쏴볼 수도 있다.
되살려야 할, 하동읍성
내가 ‘읍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창읍성 때문이다. 그 규모와 짜임새 있는 모양은 어느 문화유산보다 아름다웠다. 하동읍성 역시 잘 보존돼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동의 한 할인점에서부터 무너졌다. 하동읍성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주민의 말은 읍성이 잘 보존돼 있지 않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다.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했던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돼 일부가 소실되긴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헌데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철거됐다.
축성 후 287년 동안 하동을 지켜온 읍성은 결국 일본에 의해 사라져 성곽을 이뤘던 돌들 몇 개만 겨우 그 자리를 지키며 읍성이 있었던 ‘증거’가 되고 있다. 스러진 하동읍성을 보며 씁쓸했던 것은 우리 문화를 깨끗이 지우려했던 일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고, 저 읍성 돌은 사람들이 다 주서가삐리고 없어” 하시며 아쉬워하시던 한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오히려 뿔뿔이 나눠, 지금은 그 쓰임새조차도 모르는 꼴이라니…. 부끄럽고 민망할 뿐이다.
- 사진 하동읍성 터. 성곽이 있던 자리에 울창한 나무가 자라 뿌리를 뻗었다. 우리의 민족의식도 이 나무 뿌리처럼 튼튼했다면 성이 철거됐다고 그 잔해들을 주워가는 부끄럽고 민망한 일은 없었을 테다.
[ 글ㆍ사진 최명희 기자 cmh@icross.co.kr ]
[ 글ㆍ사진 최명희 기자 cmh@icros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