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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고창 학원농장 메밀밭

by 운영자 2008.09.19

초가을의 ‘크리스마스’
눈코입 오목조목 따져 보아 하나하나 예쁜 사람보다는 뭉뚱그려 조화를 이룬 얼굴이 더 예쁘다. 메밀꽃이 꼭 그렇다. 하나만 봤을 때는 길섶의 흔하디흔한 들풀처럼 고운 줄 모르고 지나치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돼 모이면 절로 입이 ‘벙그러지는’ 진풍경을 자아낸다.

메밀꽃 왕소금 알갱이만한 꽃송이들이 ‘팡팡’ 터지기 시작하는 9월이면 비로소 가을이 열린다. 지금 고창 공음면 학원농장의 드넓은 메밀밭은 함박눈 소복하게 내려앉은 크리스마스 같다.

눈 덮인 초가을의 크리스마스, 메밀꽃은 달빛보다 환한 눈(雪)빛으로 세상을 밝힌다. 그늘진 마음도 금새 밝아진다.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 슴슴한 눈물도 씻어내리고 /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 말갛게 씻어 준다 // 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 / 둥둥 떠내려오는 소금밭 / 아리도록 저린 향내…> -송수권 ‘메밀꽃밭’

메밀꽃 젖무덤으로 파고들다
봄이면 보리밭 가을이면 메밀밭…고창 학원농장
[ 사진설명 : 가을꽃 코스모스. 수수하면서도 예쁜 꽃이 코스모스다 ]

메밀밭 사이 황톳길에 서면 바람도 가만 몸을 낮춘다. 저 너머 코스모스에도 수숫대에도 소나무에도 바람이 걸리지만 유독 메밀밭에서만큼은 바람이 숨을 죽이며 가만가만 넘어간다.

이제 막 봉긋한 가슴이 자란 소녀의 젖가슴처럼 부드러운 구릉에 쫙 펼쳐진 고창 학원농장의 메밀밭. 바람도 길을 잃은 이곳은 밤새 함박눈이 내린 듯 고요하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럽다.

세상의 소란스러움마저도 이곳에 오면 묻힐 듯하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한 대목이 눈에 선하다.

고창 공음면의 학원농장은 봄이면 초록 보리밭으로, 가을이면 새하얀 메밀꽃밭으로, 하늘하늘 코스모스로 환해진다.
[ 사진설명 : 새햐얀 솜사탕 메밀꽃은 능선과 하늘이 만나는 공제선까지 둥글둥글 피어 있다 ]

쌀 튀밥처럼 메밀꽃 꽃망울을 ‘톡톡’ 터트리는 이맘때면 고창 들녘은 흰눈이 내린 듯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 구름이 내려앉은 듯 왕소금을 뿌려놓은 듯 소담스럽다.

구릉에 심어둔 메밀꽃은 멀리서 보면 새악시 수줍은 젖무덤처럼 보드랍다. 반듯하고 딱딱한 세상에 도무지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

넉넉한 곡선을 따라 난 황토 고샅길을 걸으면 구름 속에 파묻힌 것만 같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좋은 짜릿함까지 맛본다. 메밀꽃 사이 폭신한 황톳길을 걷고 또 걷는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좋다. 메밀꽃밭 사이를 걸으면 사방에서 ‘웽웽’ 벌이 날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천의 꽃들을 둔 탓에 벌은 사람 따윈 관심 없다.

풍부한 먹을거리 놀거리 앞에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마저도 그저 귀찮을 따름이다. 어쩌면 구름 속 메밀꽃밭 안에서 벌들도 너그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 사진설명 : 길 따라 길게 심어진 해바라기. 어떤 것은 이미 져 가을의 시작을 알리고, 또 어떤 것은 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있다 ]

드넓은 메밀꽃밭을 언제 다 둘러보나 걱정이라면,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가벼운 운동화에 종아리를 넘긴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메밀꽃밭 사이를 달리면 CF 속 주인공이 부럽지 않을 듯.

학원농장의 메밀꽃밭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낮은 구릉 너머로 보이는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새햐얀 솜사탕 메밀꽃은 능선과 하늘이 만나는 공제선까지 둥글둥글 피어 있다. 메밀꽃밭에서는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메밀꽃밭 너머에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다. 길을 따라 길게 심어진 해바라기는 어떤 것은 이미 져 가을의 시작을 알리고, 또 어떤 것은 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있다. 자전거대여소를 사이로 맞은편 밭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메밀밭처럼 너른 규모는 아니지만 하얗고 분홍 코스모스들이 가을을 반긴다.

문득 어린시절 추억에 잠긴다. 코스모스 가느란 모가지 똑똑 끊어 한잎 두잎 세잎 네잎 꽃잎을 따, 손바닥으로 살살 비벼 휭 날리면 자연이 만든 바람개비가 되고 했었는데…. 바람개비가 되지 못하고 따낸 코스모스 꽃잎은 어느 책 속에 곱게 꼽혀 한동안 가을을 머금었었다.

봄꽃 구경 못지않은 가을꽃 마중으로 마음이 여유롭다. 한가득 가슴에 가을을 품고 온 지금, 가슴 한켠 가을 들녘이 오롯이 담겼다. 이것으로 또 가을 한철 숨 돌리리라.

[글ㆍ사진 최명희 기자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