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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가을…창덕궁 단풍맞이

궁궐의 가을…창덕궁 단풍맞이

by 운영자 2008.11.07

단풍, 아름답게 사그라지는 목숨

사그라진다.
지난 봄 보드라운 여린 잎들로 마음을 간질이더니, 여름 진초록 튼실함으로 눈부시게 하더니, 시방 깊은 가을 혼신의 힘을 다해 바알간 불을 켜고 세상을 밝힌다.

그 마지막 등불마저 사그라지고 덜어내고 나면 이제 죽은 듯 가만히 몸을 낮추고 다시 봄을 준비한다. 나무의 일생이다.

시인 나태주는 <단풍>이라는 시에서 단풍을 두고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이라 했다.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에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했다.

천지가 단풍 붉은 빛으로 일렁인다. 물빛도 붉고 낯빛도 붉고 사람들의 웃음도 붉고 바람마저도 붉다. 곱디고운 그 붉은 빛깔은 아름다움과 매혹을 넘어서 쓸쓸함을 불러온다.

여린 봄 햇살부터 아프도록 따가운 여름 햇볕까지 온몸으로 받아내며 양분을 만들던 잎들이 이제는 ‘뚝뚝’ 떨어지고 끝내 썩어 또 다시 양분이 된다. 작은 나뭇잎의 속내가 어찌 그리도 깊은지….

마지막을 앞두고 붉고 노랗게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나무들. 쇠락한 궁궐에서 나무의 일생을 돌아본다. 텅 빈 나와 만난다.
[사진설명 : 창덕궁 기와에 사뿐히 내려앉은 붉은 단풍.]

‘사각사각’ 가을 익어가는 소리
창덕궁 단풍맞이·낙엽 밟기
세상의 많은 소리 가운데 유독 편애하는 소리가 있는가.

조선시대 문인인 송강 정철은 ‘맑은 밤 달이 밝은데 누각 머리가 구름을 멈추게 하는 소리’를 제일로 쳤고 심일송은 ‘온 산이 단풍으로 울긋불긋하고 바람이 불 때 원숭이 우는 소리’를 최고라 여겼다.

서애 유성용은 ‘새벽 창가에 졸음이 밀려오는데 술독에 술 거르는 소리’를 이월사는 ‘산간 초당에 재자(才子)가 시를 읊는 소리’를 제일로 여겼고 백사 이항복은 ‘동방화촉(洞房華燭) 좋은 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 벗는 소리’가 제일이라 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소리가 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가만 나무에 귀를 대보자. 가을이 익어가는, 단풍이 물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잎맥을 타고 쪼로로 색이 퍼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내가 세상에서 유독 좋아하는 소리는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고,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다.

# 마지막 조선왕조의 숨결 들릴 듯
보통 단풍 맞이나 낙엽 밟기는 산을 최고로 여긴다. 하지만 깊은 가을의 단풍은 왠지 쇠락한 왕조와 닮아 있다.

아쉽게 마감한 조선왕조. 마지막 왕후인 순정효황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길로 떠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그의 아내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까지 머물다 간 창덕궁은 더욱 그렇다.
[사진설명 : 창덕궁 존덕정을 지나 입구로 나오는 길. 소복하게 쌓인 낙엽을 밟는다. 역사를 밟는다.]

# 창덕궁, 자연과의 조화 ‘으뜸’
창덕궁은 태종 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왕의 행차시 머물던 별궁)으로 지어진 것으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보존되고 있는 이곳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 대칭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궁궐들을 골짜기 안쪽에 안기도록 지어져 있다.

이 같은 독특한 건물 배치는 동아시아 궁궐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한 궁이라 평하고 있다.

창덕궁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매주 목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은 개별관람이 불가하고 정해진 시간에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관람해야 한다. 월요일은 휴궁일. 매 시간 15분과 45분에 입장하는데 안내자의 설명이 곁들여져 궁궐을 이해하기에 훨씬 좋다.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 금천교(錦川橋)를 건넌다. 서울에 남아있는 옛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를 건너면 창덕궁의 으뜸이 되는 건물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식 등 왕의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던 의식 공간이다. 그밖에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善政殿), 임금의 침전인 희정당(熙政堂), 왕비의 침전 대조전(大造殿),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자다는 동양 전통적 우주관이 담긴 연못 부용지(芙蓉池) 등으로 구성됐다.
[사진설명 : 낙선재.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소박한 이곳은 현종이 사치를 경계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 사치를 경계하는, 낙선재
창덕궁을 둘러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낙선재(樂善齋). 현종이 편히 쉬며 책을 볼 요량으로 지어진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마치 서민들의 집처럼. 이는 사치스러움을 경계하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 한다. 사치와 향락이 난무했던 궁 안에서 그것을 경계하려 했던 현종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또한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妃)인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의 숨결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이곳은 그래서인지 유난히 따뜻한 느낌이 든다.

부용지(芙蓉池)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인데, 창덕궁을 찾은 지난 1일에는 아직 단풍이 다 들지 않아 아쉬웠다.
[사진설명 : 승화루 앞 소나무. 심어진 모양이 참 아름답다.]

책을 보관하던 곳인 승화루(承華樓) 앞의 소나무도 무척 아름답다. 마치 구름 같다. 계단 사이사이 심어진 소나무는 궁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조선의 궁궐을 상징한다고 한다.

애초,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택한 것이 조선의 마지막 왕조가 지낸 창덕궁과 단풍이었다. 2시간 남짓 찬찬히 창덕궁을 관람하며 지는 것의 아름다움은 물론 지고 나서 남긴 것들의 아름다움이 더 마음에 남는다.

나뭇잎이 지고 나서 다시 거름으로 남고, 왕조가 지고 나서 역사가 남는 것 말이다.

[글·사진 : 순천광양 교차로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