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장성 백양사 단풍

장성 백양사 단풍

by 운영자 2008.11.14

수줍은 아기단풍 볼 ‘발그레’

갓 태어난 아기 손바닥 같은 ‘아기단풍’이 발그레 볼을 붉힌다. 여린 초록잎 반짝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위에서부터 차례차례로 수줍은 얼굴을 붉힌다.

<단풍들은 / 일제히 손을 들어 /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 단풍들은 대답하네 / 이런 것이 삶이라고 //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 조태일 ‘단풍’ -

노을로 물든 가을 하늘 향해 수줍게 몸을 물들인 단풍을 두고 시인은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 한다. 단풍처럼 그렇게 뜨겁게 살다 가는 것이 삶이라 한다.

자그마한 몸을 온통 뜨겁게 태우고 있는 장성 백양사의 아기단풍을 본다. 지금껏 나는 뜨겁게 몸을 살라 열중했던 일이 있었는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살아왔는가.

백양사 아기단풍은 그렇게 화르르 타오르고 있다. 단풍을 그대로 담은 연못 물도 화르르 타오른다. 물속에서도 단풍 불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타오른다.
붉은 단풍 속으로 파고들다
단풍 터널 지나 단풍 숲속으로

곱다.

곱다와 예쁘다는 다르다.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치자 물들인 한복 입은 여인네의 자태는 곱고, 반짝이는 화장에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이효리는 예쁘다.

예가 적절했는지 모르겠지만 곱다와 예쁘다는 확실히 다르다. 가을 붉은 단풍은 곱다. 봄꽃들이 예쁘다면 가을 단풍은 곱다.

장성 백양사 아기단풍도 곱게 물들었다. 현란한 빨강이 아니라 한 단계 명도와 채도를 낮춘 붉은 빛은 예쁘다기보다 곱다. 자꾸 자꾸 봐도 질리지 않는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첫손에 꼽히는 장성군 백암산 백양사.

단풍나무, 내장단풍, 아기단풍, 당단풍, 좁은단풍, 털참단풍, 중국단풍, 네군도단풍 등 13종의 단풍나무가 섞인 이곳은 나무마다 다른 빛을 자아낸다. 은행잎 노란빛에서부터 홍시 빛깔, 태양초 고추 붉은빛까지…. 현기증이 날 듯 형형색색 단풍은 백암산의 자랑.
[사진설명 : 백양사 등산로에서 만난 단풍나무 오솔길]

백양사 고운 단풍 만나러 가는 길, 자연은 제 색을 가만히 낮추고 있다. 산을 빽빽이 메운 잣나무·소나무·삼나무는 예의 진초록빛에 회색 물감을 탔다.

초록 선명함을 버려, 단풍 붉은 빛을 더 빛내고 있다. 1시간 30여분의 단풍 여행길은 사박사박 내려앉은 낙엽 구경, 함초롬한 국화 구경에 지루하지 않다.

백암사 백양사 단풍 길은 백양관광호텔 앞에서 매표소까지 이어지는 약 1.5㎞의 산책로부터 시작된다. 이 길은 도로 쪽으로 둥그렇게 고개를 숙인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주차장은 매표소 위에 있지만 제대로 단풍 구경을 하고 싶다면 차를 두고 단풍 터널을 걸어보길 권한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단풍으로 머리 장식을 해도 좋겠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단풍 길은 이어진다. 왼편 연못 모양으로 둥그렇게 자란 단풍나무는 연못에 비쳐 또 한번 단풍을 만들어낸다. 소복하게 쌓인 낙엽을 밟으면 발끝에서부터 고소한 가을 냄새가 난다.

한참을 오르면 멀리 익숙한 풍경의 누각을 만나게 된다.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누각은 쌍계루.

단풍과 고색창연한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은 사진작가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해, 이른 새벽부터 삼각대에 카메라를 받치고 ‘기다리는’ 사진작가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쌍계루는 그 모습 자체도 물론 멋지지만 연못에 비친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멀리 백암산의 하얀 기암은 하얀 학 무리가 사뿐히 내려앉은 듯하다.

쌍계루를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이곳이 백양사(白羊寺) . 백제 무왕 632년 세워진 이곳은 처음 백암사라 불리다 고려 덕종 때(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 다시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중창하면서 백양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진설명 : 학 모양의 기암괴석을 머리에 인 백양사 대웅전. 훤하다.]

백양사라는 이름은 환양선사가 학바위 아래 영천암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할 때 설법을 함께 듣던 하얀 양 한 마리가 환양선사의 꿈에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지어 양으로 변했는데 스님의 설법을 듣고 회개해 다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고 절을 했다 한다.

그 이튿날 영천암 아래 거짓말처럼 흰 양이 죽어 있었고 그 때문에 ‘백양사(白羊寺)’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것.

사천왕문을 지나 백양사 대웅전으로 향하는 아름드리 보리수나무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기원을 써 걸어둔 표가 한가득 걸려 있다. ‘취업 성공’ ‘가족 건강’ 등 저마다의 바람을 써두었는데 취업캠프를 다녀온 이가 적었을 법한 ‘취업 성공’이라는 기원이 유독 가슴 깊이 남는다.

백양사 대웅전은 백암산 기암괴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데, 툭 트인 풍경과 단풍, 기암괴석의 조화가 신비롭다. 40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극락보전은 백양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절 경내와 맞은편에는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됐다.

사찰에 비자나무를 심는 건 그 열매가 기생충을 구제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백양서로 접어드는 길목 만날 수 있는 500살 엄청난 나이를 먹은 3000여 그루의 갈참나무도 귀하다.
[사진설명 : 물에도 단풍 물이 들었다.]

쌍계루를 지나 왼편은 백양사고 오른편 길은 등산로다. 오른편으로 오르면 운문암, 상왕봉, 백학봉, 영천굴, 약사암 등에 닿을 수 있다. 그리 높지 않지만 가파른 길이니 주의할 것.

그간 여러 차례 드나들어 ‘백양사의 단풍은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백양사를 새롭게 보게 됐다. 한달음에 보지 않고 야금야금 찬찬히 구석구석을 돌아본 덕이다.

너무 잘 안다고 믿었던 것의 새로운 모습을 본 듯 신기하고 또 새롭고 그래서 즐겁다. 선연하게 고운 단풍들이 더 곱다.

[글·사진 : 순천광양 교차로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