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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읍 태백산맥문학관

벌교읍 태백산맥문학관

by 운영자 2009.01.30

소설 <태백산맥> 현장 벌교를 가다.

살면서 한번쯤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읽어본 책 한권은 누구나 있을 터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흐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문체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으며, 잠이 도통 오지 않아 억지로 읽었을 수도 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은 그 쫄깃하고 질펀한 말맛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던 책이다.

전라도 토박이인 탓이기도 하지만 어찌나 사투리가 그리도 잘 표현됐는지, 비중 낮은 마을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도 마치 옆집 아줌마가 한풀이 하는 듯한 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전라도의 차진 말맛에 반한 것은 순전 <태백산맥> 때문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서린 소작인들의 한과 분노는 벌교 곳곳에 아직까지 살아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조성된 ‘태백산맥문학관’에서도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작가 조정래가 발표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일제 말기∼해방∼여순사건∼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러한 역사의 베틀은 남해안의 한 포구인 벌교에서부터 조계산, 지리산, 태백산, 거제포로수용소 등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한올 한올 짜여진다. 벌교뿐 아닌 이 모든 곳은 그 자체가 역사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버무려져 있는 공간이다.
[사진설명 : 태백산맥 문학관 입구의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 벽화. 통일의 염원이 담겼다.]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닌
솥뚜껑 같은 힘과 의지로 크는 것


날이 잔뜩 찌푸리다. 간밤에 다시 펼쳐든 <태백산맥> 탓에 눈도 피로하다. 벌교만 유독 지주의 수탈이 심했고 그로 인해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흐린 날의 벌교는 마치 소설 속을 재현한 듯 더 낮게 깔린다.

벌교읍 <태백산맥> 기행은 준비물이 아주 간단하다. 순천에서 넉넉잡아 30~40여분. 광양에서도 1시간 내로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별 채비가 필요 없다.

하지만 굳이 좀 긴 준비를 하자면 <태백산맥>을 읽기를 권한다. 기행의 맛이 배가될 것이다. 또 다른 준비물은 보성군에서 나온 관광안내도.

관광안내도에는 <태백산맥>의 배경이 됐던 현부자집은 물론 횡갯다리, 회정리 교회, 소화다리, 김범우 집 등이 잘 표시돼 있어 찾기 아주 수월하다.
[사진설명 : 10편 대작에 필요한 인물 관계도. 등장인물만도 수십 명이니 저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 문학관, 소설의 역사가 한눈에
벌교읍 터미널 바로 옆에 위치한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향한다. 지난해 11월 세워진 이곳은 <태백산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문학관에 들어서기 전 오른편의 벽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라는 제목의 벽화는 단풍잎 같기도 하고 뱀의 악다구니 같기도 한 것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필시 갈라진 남북을 형상화한 듯하다. 떨어져있는 둘은 맞붙기만 하면 아귀가 딱 맞을 것 같다.

문학관에 들어선다. 문학관은 2층으로 나눠졌는데 1층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집필 동기, 자료조사 흔적, 태백산맥의 줄거리,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와 논란 등이 전시됐다.

이곳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작가의 노력이 한눈에 보이는 자료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벌교 곳곳의 지도와 등장인물들의 관계도 등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또한 자료조사를 위해 숱하게 걷고 다니며 수집했던 작가의 모든 것이 전시됐다. 소설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한지, 그래서 그 소설이 얼마나 귀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1만6500매의 육필 원고 탑도 눈에 띈다.

2층은 조정래 작가의 삶과 태백산맥 외 작가가 쓴 작품들을 전시해뒀다. 또 아들과 며느리, 독자들이 필사한 태백산맥 원고도 눈길을 붙잡는다.
[사진설명 : 저 2층에서 소작인들을 감시하며 제 배를 불렸을 <태백산맥> 현부자네집]

∥ 지주 현부자네
문학관을 나와 왼편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태백산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현부자집이다. 낮은 기와가 아닌 2층으로 지은 솟을 대문이 위풍당당하다.

이곳은 어째 한옥이라 하기에 좀 애마하다. 기와와 처마는 한옥의 것이지만 대문 위 2층 창 등 집안 곳곳이 일본식 건물의 틀을 하고 있다.

특히 대문 위 2층에 오르면 벌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현부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중도들판 웃머리로 이어진 자신의 농토를 구경삼고, 연못가의 나무그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서도, 솔솔바람 시원한 정자에서 기생들의 춤과 노래를 안주로 낮술이 거나하게 취해가면서도’ 소작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부자의 이런 철저한 감시로 지금의 저 방죽과 들판이 생긴 것이다. 뻘밭에 방죽을 세우기는 현부자의 덕(?)이 아니었으면 해내지 못했을 터다.

길게 펼쳐져 있는 중도들판은 벌교 앞바다 10여리를 둑으로 막아 일군 눈물어린 간척농지다. 일본인 중도(中島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인 중도방죽은 사람의 손으로 돌과 흙을 퍼날라 땅을 만들었지만 일제와 해방 후 지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낼 수밖에 없었던 소작인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쌓는 일에 비하겄소.

근디 기맥히게도, 방죽을 다 쌓고 본께 배불리는 놈덜언 일본눔덜 이었다 그것이요. 방죽을 쌓다가 죽기도 여럿 허고, 다쳐서 빙신 된 사람도 많고….”

소설 속에서 방죽 쌓던 때의 어렵고 골 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하대치의 아버지가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그 덕에 벌교의 3대 평야에 들어간단다.
[사진설명 : 1만6500여장의 원고. 그 노력이 원고탑 안에 고스란히 스몄다.]

이밖에도 소설에서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 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학교를 그만둔 이지숙이 이곳에서 야학 교사로 일한 곳인 회정리 교회와 여순사건, 6ㆍ25 등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어낸 ‘피의 다리’ 소화다리도 볼 수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보겄구만이라. 사람 죽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소화다리를 묘사한 대목이 귓전을 울린다.

[글ㆍ사진 :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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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백산맥 문학관 입구의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 벽화. 통일의 염원이 담겼다
3. 1만6500여장의 원고. 그 노력이 원고탑 안에 고스란히 스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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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사진설명-지주 현부자네. 저 마당에 서면 벌교 들녘(중도 들판)이 눈앞에 다 보인다. 소작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