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나주 금성산 자락 ‘다보사’

나주 금성산 자락 ‘다보사’

by 운영자 2009.03.27

눈 닿는 곳마다 꽃, 꽃, 꽃

천지가 꽃이다. 발아래 노란 민들레부터, 목련,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진달래까지…. 형형색색 꽃들로 눈이 즐겁다. 마음도 절로 벙글어진다. 그러다 문득 저 꽃들도 하나둘 떨어지고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진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져 멋없는 조화는 싫다. 가꾼 이의 손길과 정성도 담기고, 바람 소리 햇살 냄새 묻은 것이라야 한다. 자연 속에서 기운 받아 무럭무럭 큰 것.

한참을 생각하니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꽃이 있다.
해, 바람, 비, 새가 골고루 사랑하고 가꾼 이의 정성이 담뿍 든. 게다가 세월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꽃살이다.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칼과 붓으로 피워 놓은’, 여느 절집이든 이무롭게 찾아가, 맘껏 보고 만지고 향기 맡고 올 수 있는 꽃살 말이다.

봄이다. 꽃살문에 새겨진 꽃까지 합치니 봄꽃이 더 풍성하다. 눈 닿는 곳마다 그야말로 꽃 천지다.
[사진설명 : 다보사 가는 길의 개나리]

‘나만 아는’ 보물 같은 꽃 나들이길
나주 다보사 ‘꽃’놀이


학창시절, 나는 깍쟁이였다. 좋은 것을 나누는 푸진 아이가 아니라 그럴수록 더더욱 내 안으로만 감추는 깍쟁이 말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좋은 노래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내 카세트테이프에만 녹음해 듣고 다니고, 한적하지만 무섭지 않은 골목길의 봄 밤 향기도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다.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나들이 장소가 있는가. 누구나 다 아는 남해 벚꽃길 말고, 목포 유달산 개나리꽃 놀이 말고, 광양 매화밭 말고 나만 아는 명소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몇 시간 다리품을 팔아 겨우 꽃구경을 마치고 피곤에 곯아떨어질 때, 심지어 사람 구경만 하다 올 때에도, 나는 온전히 그것을 즐기고 재충전하는 나만의 은밀한 나들이 장소.
오늘, 깍쟁이 같던 심성을 버리고 거하게 한판 쏜다!

개나리꽃 마중 받으며 올라, 벚꽃 터널 사이에 취하고 진달래, 목련, 수선화, 꽃잔디 온갖 봄꽃들을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곳. 게다가 영원히 지지 않을 고운 꽃살문의 꽃까지 덤으로 선물한다. 바로 나주 다보사(多寶寺) 가는 길이다.
나주 다보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절이다. 나주 시내와 그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금성산 깊은 곳에 자리한 탓에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한번 가고 나면 두고두고 눈에 밟혀 종종 찾게 되는 곳.

나주에 들어서, 이정표를 따라 다보사로 들어선다. 다보사 가는 길은 꽃이 먼저 반긴다. 개나리가 노오란 손을 흔들고, 하얀 목련도 아는 체한다.

다보사 오르는 길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차를 갖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향긋한 산 공기 마시며 걷기를 권한다.

벚꽃놀이는 아직 이른 모양이다. 산 아래 도시에서는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벚꽂이 산속 절에서는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아니, 참고 기다리자. 대신 왼편 금성산 등성이에서 만날 수 있는 진달래로 위안을 삼자.
[사진설명 : 금강문 오르는 계단에서 만난 꽃잔디.]

아직 색을 짙게 채우지는 못했지만 연분홍빛 진달래도 곱고 또 반갑다.
금성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다보사는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에 속한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다보사의 창건과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시대인 661년(문무왕 1)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184년(고려 명종 14)에 지눌이 중창을 한 이래 1594년(조선 선조 29)에 서산대사 휴정이 다시 중창하였으며 현재 보이는 사찰의 주요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제 침략 때는 총독부의 대처승 제도 실시에 따른 박해를 피해 비구니 스님들이 은거ㆍ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절 입구인 금강문에 들어선다. 입구 왼편으로 곱게 핀 동백이 눈길을 붙잡는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동백이 제 모양대로 곱다. 계단을 오른다. 함초롬하게 핀 보라색꽃이 수줍게 바람에 흔들린다. 꽃잔디다. 돌 틈에서 곱게 핀 것이 대견하다.
[사진설명 : 꽃살문. 영원히 지지 않을 꽃이다.]

기와로 길을 낸 길을 따라 대웅전으로 향한다. 두말 할 것 없이 꽃살문에 눈이 간다. 쌍여닫이 빗꽃살문에 정교하게 조각된 문살이 아름답다.

꽃살문이라는 시를 쓴 이정록 시인은 “내소사 꽃살문을 만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꽃살문의 꽃송이를 원고지의 붉은 문장에 옮기는 사이, 꽃잎 위에 나이테가 열 두 바퀴 더 돌았다. 서둘러 피우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 서두르지 않은 것이 시인뿐이겠는가. 꽃살문을 하나하나 아로새긴 이의 정성이야 말로 서두름이 없었을 테다.
[사진설명 : 명부전 앞 수선화가 곱다.]

명부전, 칠성각 앞 화단에 노랗게 핀 수선화도 예쁘다.
오늘 하루 본 봄꽃들이 몇 개인지 가늠해본다. 생각지 못했던 꽃잔디에 수선화에 수확량이 넉넉하다. 게다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꽃살에 푸른 산 기운까지 받았으니, 아침밥 든든히 먹고 나온 출근길처럼 뿌듯하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