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화순 춘양면 복사꽃 흐드러지다

화순 춘양면 복사꽃 흐드러지다

by 운영자 2009.04.17

꽃이 부르길래, 그저…
“봄 밤 냄새가 너무 좋다. 집앞이야. 나올래?”

10여년 전, 제게 ‘봄 밤 냄새’를 알려준 그는 지금 곁에 없지만 해마다 봄 밤 냄새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저는 종종 그날을 추억합니다.

꽃이며 벌이며 나비며 새싹이며 사람이며 심지어 저 땅 속 개미들까지 난만한 봄 낮 말고 사위가 죽은 듯 조용하고 오직 냄새만 가득한 봄 밤의 적요를 아시는지요.

매화, 산수유, 벚꽃, 개나리, 진달래, 배꽃, 복사꽃, 아카시아… 온갖 봄꽃들이 피고 지고 날려 고샅고샅 향기가 밴 봄 밤은 고양이 발자국 소리에도 ‘폴폴’ 향기를 풍깁니다.

<꽃 지는 봄밤을 / 걸어다녔습니다 / 애써 떨구려 해도 / 몹쓸 놈의 마음 / 당신 쪽으로 먼저 가버리고 / 접질린 발목 부어오르듯 / 몸뚱이만 남아 시큰거렸습니다 / … /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 먼 데 있어도 /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을 / 그저 당신께 / 투둑투둑 심장이 터지는 소리로 / 꽃들이 핀다고 /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 정지원 ‘꽃이 부르길래’ -

봄 밤의 추억을 간직한 이는 비단 저뿐은 아닌 모양입니다. 시인도 ‘투둑투둑’ 심장이 터진다고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렇게 고우면 대체 어쩌라고!
봄빛 완연한 ‘화순’

“아이, 내 강아지! 어째 복숭아꽃 보러 한번 안 오냐? 여그는 시방 천지가 복숭아꽃이다. 언능 와야. 핌서 짐서 헝께 쫌 있으믄 보고자와도 못 봉께. 언제 올래? 지금 올래?”

칠순이 다 된 이모에게 서른이 넘은 나는 아직도 ‘강아지’다.
“오야, 내 강아지. 언제 시집 가까잉. 나 죽기 전에 꼭 시집 가라잉.”

전화만 하면 듣는 ‘강아지’ 소리. 낯간지러우면서도 이모의 살가운 정이 느껴져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호칭이다.
[사진설명 : 화순 춘양면 용두리 복숭아꽃. 기와 지붕 사이로 분홍빛이 곱기도 하다.]

화순 춘양면은 지금 복숭아꽃이 지천이다. 하긴 벚꽃 지기 시작하면 바로 핀다고 했으니 이맘때쯤이면 피었을 테다. 서른 넘은 이모의 강아지가 ‘조심해서 오니라’ 이모의 기분 좋은 잔소리를 안고 화순으로 길을 나선다.

순천에서 화순 춘양면까지는 1시간30분가량이 걸린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구불구불 좁은 길을 달려야 하니 녹록치 않은 여정이다.

하지만 이 여정에 위로가 되는 것은 울긋불긋 봄꽃들. 특히 초등학교 때 즐겨보던 EBS의 밥 아저씨의 그림이 연상되는 산은 정말 예뻐서 절로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산은 산벚꽃이 피어 군데군데 하얗고, 나무마다 파릇한 싹이 돋아 싱싱하다.
이모에게 드릴 딸기 한 바구니도 긴 여정의 좋은 친구다.

먹지 않아도 진하게 퍼지는 딸기 향은 절로 기분이 좋게 하는 ‘아로마테라피’ 효과를 지닌다. 게다가 손이 얼얼한 지하수에 씻어 이모 하나, 나 하나 먹을 생각에 더 즐겁다.

화순 춘양면은 골짜기 골짜기에 있다. 화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다. 개나리, 꽃잔디가 곱게 피었다.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 마을에 들어서자 저 멀리 분홍 복사꽃이 반긴다.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조지훈 시인의 ‘승무’ 한 구절이 떠오른다. 복사꽃 빛깔 뺨이라니 얼마나 고운지!

마을회관 앞에 차를 두고 곧장 복숭아밭으로 달려간다. 복숭아밭 너머 마늘밭이 진초록으로 푸르다. 돌담 너머 복숭아꽃이 곱다. 터널처럼 서로 어깨를 맞댄 복숭아나무에 방울방울 꽃이 달렸다.

연분홍 복숭아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혹 꽃이 다 떨어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보고 있어도 조바심이 난다. 바람 한 점에 우수수 꽃비가 내린다. 벌써 나무 아래는 복숭아꽃의 풍장이 이뤄지고 있다. 한 잎 두 잎. 참 곱기도 하다.

저 멀리 무등산 자락에도 봄이 왔다. 산벚꽃, 진달래, 개나리가 울긋불긋.
복숭아나무 아래 등이 굽은 이모가 있다. 여느 봄처럼 이모는 복숭아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짚을 깔고, 지지대를 세운다.
[사진설명 : 쌍봉사 마당에 서면 봄으로 물든 무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개 돌려 우연히 ‘강아지’를 발견한 이모가 놀라며 함박 웃는다. 복숭아꽃만큼이나 곱다.
춘양면까지 와서 쌍봉사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은 참 서운한 일이다. 물론 한참을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말이다. 내친 김에 차를 돌린다.

지금쯤이면 쌍봉사 담벼락에 담쟁이 들이 고운 손을 친친 감고 있을 테고, 대웅전 옆 나무들도 봄빛이 가득할 테니 말이다.
[사진설명 : 쌍봉사 대웅전. 나무들이 봄을 달았다.]

구불구불 조심스레 차를 몰아 도착한 쌍봉사. 입구 옆 연못에 색색의 연등이 걸렸다. 연못 아래로 비친 연등 빛깔도 곱다 .

절 돌담에 예상대로 담쟁이가 뻗어나가고 입구에 영산홍도 주황빛을 마구 내뿜는다. 계단을 올라 입구에 오르니 대웅전이 떡 하고 가로막는다. 한자는 분면 대웅전인데 낯설다.
[사진설명 :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철감선사 부도탑]

다른 절들과 다르다. 이곳의 대웅전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에 3층 목탑 모양. 쌍봉사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보기 드물게 목조탑 형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목조 건축물이었지만 지난 84년 화재로 소실된 뒤 86년 복원됐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석가삼존과 동국진체풍의 현판 글씨는 불 속에서 구해내 전과 같다.

대웅전을 주변으로 봄 기운이 짙다. 파릇파릇 싹이 돋고 저 너머 개나리 색도 짙다.
쌍봉사의 매력은 독특한 대웅전과 더불어 국보급의 부도들. 대웅전을 왼편으로 돌아 대나무밭 옆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대나무 밭에서 다람쥐를 만난다. 오랜만에 만난 외지인이 반가운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는다. 이 순간을 놓칠 새라 셔터를 누른다. 고놈 참 귀엽다.

차밭과 대숲 지나 있는 철감선사 부도탑(국보 제57호)과 부도비.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산이 깊어 해가 일찍 진다. 서둘러 길을 나선다.

연분홍 복사꽃에 일렁이던 마음이 쌍봉사를 둘러보며 다시 차분해졌다. 깊은 산 맑은 기운이 폐 깊숙이 파고든다. 역시 봄 밤이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