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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 발자취 따라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발자취 따라서

by 운영자 2009.08.21

가시밭길 속에서도 늘 ‘민주·평화·민족’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8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정치 일생을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의 산 증인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그와 함께 독재와 맞서 전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
아마도 그에게 평생의 화두가 아니었을까. 몇 번의 죽을 고비와 억울한 누명에도 인동초 마냥 불사조 마냥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이었을 테다.

찢기고 아프고 피 나는 가시밭길 속에서도 늘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을 외쳤던 그가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조금 늦었지만, 그의 발걸음을 단 몇 발짝이라도 따라가 본다.
누명·납치·고문·사형선고, 그러나 죽지 않은 ‘인동초’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향 ‘신안 하의도’

정치적인 고향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 (현재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김운식(金云式)과 장수금(張守錦)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마을 ‘후광’을 평생 아호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목포상업학교 졸업후 곧바로 해운회사인 목포상선회사에 취업해 사업가로 활동했다. 또한 1948년 10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목포일보 사장을 지내며 언론인의 길을 걸었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신민당 목포지부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나라를 바꾸고, 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계속 반독재 정권과 맞서 싸워왔으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끊임없는 운동을 전개했다.

1961년 5월 치러진 재선거에서 승리해 민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된 그는 이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 채 첫 임기를 마쳤다.
5·16 쿠데타는 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90년대 민주화 시대를 연 ‘양김 시대(김영삼, 김대중)’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배해 민주주의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유신을 선포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망명 중에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해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살해당할 뻔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가택연금 생활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정권에 이어, 1979년 12·12 군부 쿠데타와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항쟁 무력진압 등 총칼을 앞세워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김영삼 등 야당지도자와 함께 체포, 구금됐다.
더욱이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감형이 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귀국했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가택에 연금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후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가 발생하고, 같은 해 6월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 등으로 6·10항쟁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87년 6월 항쟁은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6월 항쟁 이후 사회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것이 국민적 평가다. 물론 6월 항쟁의 결과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중심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 개선 등의 일관된 정책을 펴왔다.

그는 또 대통령에 취임하자 자신을 핍박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하고, 사면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0년 6월 15일 그는 분단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협력의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작가 유시춘씨의 표현대로 “이 평화주의 노선은 국제공인을 획득했고 노벨평화상이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을 위한 그의 노력은 2008년 8월 18일 영면에 들어갔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