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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황토밭 너머 돌담길 따라

해남, 황토밭 너머 돌담길 따라

by 운영자 2009.10.23

‘시(詩)’가 방언처럼 터지는

해남을 떠올린 것은 순전히 ‘남도행’이라는 시 때문이다.
“칠월 백중날 고향집 떠올리며 / 그리운 해남으로 달려가는 길 … (중략) … 그림 같은 산과 들에 절하고 싶어라 / 무릎 꿇고 남도 땅에 입 맞추고 싶어라”

시인 고정희는 ‘남도행’이란 시에서 고향 해남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했다.
14개 읍·면을 거느려 군 단위로는 전라남도에서 제일 큰 해남은 비옥한 땅이다.

해남 땅끝. 걸어서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이곳은 앞으로는 점처럼 동동 뜬 섬들이 조르르하고, 뒤로는 두륜산, 달마산 등 바구니를 엎어놓은 듯한 야트막한 산들이 들판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붉은 황토밭에 배추와 고구마가 풍년이다.

그 풍요로운 땅에서는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온다. 시(詩)가 방언처럼 터져 나온다. 한국 시조문학의 효시인 고산 윤선도 선생을 시작으로 황지우, 김준태,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이 바로 해남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은 김지하, 황석영 작가의 제2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 바로 해남이다.

해남 땅에 발을 딛는다. 소슬한 가을바람 너머 노랫소리가 윙윙거린다.
풍요로운 땅에서 절로 흥얼거려지는 ‘노래’
해남 윤선도 유적지, 김남주ㆍ고정희 시인 생가

해남 땅은 따로 단풍철이 필요 없다. 사시사철 붉은 황토 흙 때문이다. 해남의 붉은 황토흙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넘친다. 촉촉하고 차진 황토흙에서는 잘 안 자라는 것이 없을 듯싶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해남을 “서울에서 먼 곳에 있으며 겨울에 초목이 마르지 않고 벌레가 움츠리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붉은 고구마, 속 찬 배추, 해남이어서 더 유명하고 더 맛난 것이다.

열심히 풍로 돌려 활활 타오른 아궁이 불씨마냥 해남은 풍요롭다. 그 풍요로운 땅에서 노래가 냇물처럼 흐르고 시가 방언처럼 터진다.
■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 유적지
조선 중기의 시인 고산 윤선도의 종택 녹우단. 해남읍 연동리의 녹우단은 윤선도의 고향 집이다.
녹우단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됐으며 규모가 큰 민가로 대문, 사랑채, 사당 및 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ㄷ자로 남향해 앉은 고옥(古屋)은 원래가 수원에 있었던 것.

세자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효종이 고산 윤선도를 늘 곁에 두고 싶어 수원에 이 집을 지어 주었으나 효종이 승하하고 조신들의 모함에 낙향하게 되자 옛 왕과의 정을 생각해 집을 여기로 옮긴 것이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서당이 있다.
녹우단 입구에는 수령 500년, 높이 20m의 은행나무가 예쁜 기와돌담을 배경으로 서 있다. 뒷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녹우당 옆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 비자나무숲이 나온다. 빽빽이 들어선 비자나무숲 사이에 송림과 활엽수림이 간간히 섞여 있다.

흔히 윤선도의 유적지를 녹우당이라 하는 이들이 있는데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가 녹우당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을 녹우단이라 부른다.

여기서 ‘녹우’(綠雨)란 녹우단이 들어선 뒷산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녹우단 오른편에는 윤선도유물관이 있는데, 윤선도의 수많은 가사(歌辭) 친필본이 그대로 전해지며, 예조참의 벼슬을 내린 임금 교지 등이 전시됐다. 뿐만 아니라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작품들이 전시됐다. 특히 문화유산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수 있어 좋다.
■ 쓸쓸한, 시인 고정희 생가
“시인 고정희가 죽었다. 유월 구일 낮 열두시 삼십 분,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죽었다…. 고정희가 죽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그리고 지리산 뱀사골이라니. 그는 ‘고정희’ ‘죽었다’ ‘지리산’ ‘뱀사골’을 각각 떼어서 생각해 본 다음 다시 그 의미들을 종합해 보았다. 마치 그것은 펄럭이는 단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먼 바다의 일기예보처럼 비현실적인 언어들같이 들렸다” - 김영현 ‘해남 가는 길’에서-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난 시인 고정희는 ‘여성’에 대한 위치를 재고한 작가다. 1980년대 초부터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맡았다. 고정희는 한국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또 그것을 실천한 작가였다.

허나 그런 수식어와는 달리 고정희 생가는 쓸쓸해보였다. 대문 앞에 작은 표지판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선뜻 들어서기 어렵다.

이불 빨래며 호박 등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해서다. 헌데 들어서 ‘드르르’ 방문을 열어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고정희 시인이 평소 즐겨 읽었던 책들이 책장에 빼곡하고, 책상도 생전 모습대로 재현해뒀다. 하지만 쓸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시인이기보다 전사였던, 시인 김남주 생가
김남주 시인을 아는가? 아마 모르는 이들이, 설사 알더라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고정희 시인의 생가와 10여분 지척 거리에 시인 김남주의 생가가 있다.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칭했듯 김남주의 시는 강렬하다. 읽으면 퍼뜩 정신이 든다.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방향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시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운동가요로 불리기도 했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조국은 하나다’ 등의 시가 대표 시이다.
김남주의 생가는 몇 해 전 복원을 해 말쑥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고정희 시인의 생가를 보고 쓸쓸하다 생각했는데, 생뚱맞게 말쑥한 김남주의 생가를 보니 참 씁쓸한 기분이 든다. ‘생가’를 그대로 두는 것이 훨씬 나았을 듯싶다.

생가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감옥의 독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곳. 머리가 천장에 닿아 허리를 숙여야 하고 팔을 뻗을 수도 없는 좁은 이 공간에서 시인은 우유갑에 못으로 시를 써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의 피땀 몇 방울이 지금을 이뤘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 온다. 지금 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도 생각해본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

- 고산 윤선도 유적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 고정희 생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 김남주 생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