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쓸쓸하고 아름답고 후련한 ‘태안’ 겨울 바다

쓸쓸하고 아름답고 후련한 ‘태안’ 겨울 바다

by 운영자 2009.11.20

겨울 바다로 가자

미처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성큼 겨울이 찾아왔다.
그늘진 창문 틈으로 황소바람이 들고, 설(雪)레는 님도 하늘에서 찾아왔다. 어느덧 세밑. 올해도 채 50여일이 남지 않았다. 이맘때면 까닭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때로 풍경이 마음을 위로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언제라도 그곳에 그렇게 있는 풍경은 ‘변함없는’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세상 한가운데서 살짝 벗어나고 싶을 때 ‘떠남’을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탓일 게다.

말 없는 풍경이 주는 그 따뜻함 탓일 게다. 그러려면 분주하고 번잡한 풍경보다는 쓸쓸하리만치 조용한 바다가 훨씬 좋다.

귀를 베어갈 것 같은 바닷바람 속에서도 온기를 느낀다. 겨울 바다에 가면 웅크린 마음들이 일어선다.
겨울바다, 온기가 가득한
태안 안면도 꽃지 바다와 송림


별안간 날씨가 추워졌다. 입동(立冬)이 지난 7일, 온난화네 이상 기후네 해도 절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모양이다. 입동이 지나자 어김없이 추위가 찾아온다. 계절이 사람의 마음도 흔들어 놓는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서자, 옷깃 싸매듯 마음도 절로 웅크려든다.

서해안에 간다. 지는 세밑에는 동해보다 서해다. 사람 와글대는 곳보다 쓸쓸하리만치 고독한 바다가 낫다.
충청남도 태안. 2년 전 이맘때, 기름 유출 사고로 한 차례 진통을 겪은 곳이라 더 애틋하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상처를 훌훌 털어냈지만 그 상처를 털어내기 위해 바다가 얼마나 몸살을 앓았겠는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겨울철. 태안 앞바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태안의 해안선을 모두 합치면 1300리나 된다고 한다. 만리포, 학암포, 안면도 등 태안 앞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곳이 너무나 많다. 뭍을 파고들었다가 아득히 멀어져가고, 다시 뭍으로 달려드는 바다. 서해안은 넉넉하고 푸근하다.
아름다운 겨울바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도 많다. 학암포, 만리포, 안흥항, 안면도 등 권역별로 이름난 여행지만 따져도 4곳이나 된다.

태안읍에서 안면대교를 건너, 안면도로 들어간다. 저 깊숙한 바다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안면대교는 ‘대교(大橋)’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짧고 작다. 안면대교를 건너면 여기서부터가 안면도다.
■ 바닷바람에도 굳건한 ‘안면송’
안면도에 들어서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소나무숲. 길 양옆에 나란한 소나무숲은 마치 굴 같다. 어둑어둑하면서도 포근하다. 차창을 내린다. 바람은 차고 세지만 소나무향을 품고 있다.

안면도 소나무는 대부분 홍송. 붉은 빛깔을 띠는 홍송은 곱고 화려하고 단아하다. 소나무가 유난히 붉고 단단한 데다 향기가 진하다. 아름드리 거목은 없지만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훤칠하다.

안면도에는 80년 이상된 안면송이 434ha에 17만 그루. 7평당 한 그루 꼴이다. 안면도 소나무는 지역 이름을 따서 안면송으로 불린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명이 이름이 된 경우다. 경복궁을 지을 때 안면도 홍송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안면송은 조선시대 왕실의 건축 사업에 쓸 소나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헌데 조선 초부터 나무를 심고 가꿨는데도 100년 이상 된 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일제 때 남벌을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송진 채취를 위해 일본인들이 나무마다 칼집을 냈다. 또 한국전쟁 때도 나무들이 많이 상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안면송.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한 탓에 더 애틋하다.
■ 쓸쓸해서 아름다운 꽃지 겨울 바다
안면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꽃지 바다를 꼽는다.
길이 3.2㎞의 꽃지 백사장은 걸어서 왕복 2시간이 걸릴 정도로 길다.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는 뜻의 꽃지라 부른다. 해마다 봄이면 그 이름 그대로 안면도세계꽃박람회가 열린다.
꽃지 바다에는 그곳의 상징이기도 한 바위 두 개가 덩그러니 놓였다. 꽃지와 방포해변을 잇는 꽃다리 바로 앞에 있는 바위가 바로 할미·할아비바위다.

신라 때 장보고의 부하장수로 안면도를 지키던 승언이 갑자기 북방으로 발령이 나 떠나게 되자, 그의 부인 미도가 남편을 기다리다가 할미바위가 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꽃지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외파수도와 내파수도, 외도, 치도 등의 섬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듯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꽃지의 겨울 바다를 찾은 이들이 많다. 맵찬 바람 때문에 사람들은 더 거리를 좁힌다. 바다 그 풍경으로 위로 받고, 사람들의 그 따뜻한 온기로 또 위로가 된다.
겨울 바닷바람에 시간도 오그라드는 모양이다. 어느덧 해가 진다. 아니 뚝 떨어진다는 표현이 맞겠다. 흐른 구름 사이로 서둘러 해가 진다. 저녁놀은 꼭 이렇게 바람이 모진 날 붉고 애잔하다.

햇덩이를 삼킨 바다에 잠시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잠시나마 훈훈한 붉은 바다에 어둠이 짙게 퍼져간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