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한반도 ‘배꼽’ 충주 여행

한반도 ‘배꼽’ 충주 여행

by 운영자 2009.12.04

‘중원(中原)’에서 길을 묻다

12월의 길목, 자욱한 안개가 먼저 맞았다.
눈앞을 흐리는 안개,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12월을 더 무겁게, 휘청이게 한다.
2009년을 마무리하고 2010년을 계획해야 하는 12월.

묻고 싶다.
내 길은 어딘지, 이 길이 맞기는 하는지, 맞다면 흔들리지 않고 잘 가고는 있는지….
흔들리는 삶이, 내일이, 미래가 걱정이라면 과거에서 길을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어제가 쌓여 역사가 된 것이므로, 어제는 곧 내일을 여는 열쇠가 된다.

‘충주는 길의 고장이다. 남한강 물길이 여기로 지나고 계립령 길이나 새재길 멀리는 죽령길 등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들이 또 여기로 이어진다. 나라 전체로 보면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목과 같은 곳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북편’에 나온 충주 소개다. 사통팔달 ‘길’이 통하는 충주에서, 내일을 묻는다.
고구려ㆍ신라ㆍ백제 역사의 함성 들리는가
한반도 배꼽서 읽는 삼국시대의 역사

중원(中原).
중원의 사전적인 의미는 1. 넓은 들판의 중앙 2. 경쟁하는 곳 또는 정권을 다투는 무대. 충청북도 충주는 한반도의 배꼽인 중원(中原)이다. 사전적 의미의 1번과 2번을 모두 충족한다. 그래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쟁터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소백산맥을 넘어 북을 넘보던 신라,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 마한을 무너뜨리고 충주를 먼저 차지한 백제까지. 어디 그뿐인가. 고려 때에는 몽골군,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맞서 싸웠던 중요한 ‘항전지’였다.

이처럼 1500여년을 넘게 왕조와 나라를 달리해 숱한 전쟁을 치렀던 중원, 충주에는 수많은 전쟁 유적이 남아 있다.
■ 삼국시대 유적, 탑평리 7층 석탑
충주호가 한달음에 보이고, 넓은 공원까지 펼쳐진 충주중앙탑공원은 삼국시대의 유적인 ‘탑평리 7층 석탑’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통일신라 때 세워진 탑평리 칠층석탑은 신라가 남한강을 차지한 뒤 세운 것으로 높이 14.5미터, 현존하는 신라 탑 중 가장 크다. 흙을 돋운 뒤 언덕 위에다 탑을 세워서인지 석탑이 더 크게 보인다. 일부러 멋을 내지는 않았지만 칠층탑은 우람하고 남성답다.

원래 충주는 마한 땅이었다가 백제에 넘어갔다. 5세기 말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서 남한강의 새주인이 됐다.

신라가 이 일대를 차지한 것은 6세기 중엽 진흥왕 때.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탑평리에 탑을 세운 것은 이곳이 바로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탑평리 7층 석탑을 중앙탑이라고도 부른다.
탑평리 7층 석탑이 있는 충주중앙탑공원은 석탑 외에도 볼거리가 다양하다. 먼저 눈앞에 훤히 펼쳐진 충주호가 인상 깊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이면 충주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또한 공원 곳곳에 세워진 조각 조형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공원 끝자락에는 술박물관 ‘리쿼리움’이 있다. 세계의 술과 술 빚는 법 등이 상세하게 소개됐다. ‘주당’이라면 꼭 한번 들러보면 좋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으니 아는 만큼 술맛이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충주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둔 충주박물관도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 고구려 유적, 고구려비
통일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도 중원을 차지한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비를 세웠다. 중앙탑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용전리 입석마을에는 고구려비가 있다.

헌데 이 고구려비를 미처 몰라보고 1979년까지 마을의 수호석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79년 학술조사 끝에 5세기 말 세워진 고구려비로 밝히고 지금에 이른다.

아마도 고구려가 삼국전쟁에서 패하면서 1500년 동안이나 잊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곳의 고구려비는 만주 땅의 광개토왕비와 비슷하게 생겼다.

충주호를 따라 계속 거슬러 오르면 탄금대(彈琴臺)로 이어진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병사 8000명을 이끌고 배수진을 치며 싸우다 전사한 곳.

허나 원래 탄금대는 그 이름처럼 가야의 악사 우륵과 인연이 있다. 패망의 기운이 짙어진 가야 땅에서 신라로 온 우륵은 멀리 남한강이 보이는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곤 했다 한다.

이밖에도 고려시대, 유일하게 몽골군을 물리친 유적지인 덕주산성이나 미륵사지 역시 고려의 유적이다.

미륵사 옆으로는 ‘하늘재’라는 이름의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 때인 156년 뚫린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놓이기 전에는 1000년 넘게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시대마다 다양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중원, 충주. 그곳에 서면 우리의 과거 역사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