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울퉁불퉁 팔영산 여덟 봉우리를 넘다

울퉁불퉁 팔영산 여덟 봉우리를 넘다

by 운영자 2010.01.22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중고등학생 시절, 참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곧장 방으로 들어와 라디오부터 켰다. 종종 그 라디오는 다음날 아침까지 켜져 있어, 엄마에게 혼이 나고는 했지만 그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내 감성을 키운 것은 8할이 라디오였다. 클래식, 팝송, 가요 온갖 종류의 노래는 그 무렵의 나를 가득 채웠다.

양희은이라는 가수를 참 좋아했다. 거의 모든 노래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조금 힘이 들때면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을 따라 불렀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찌릿 저리기까지 했다.

고흥 팔영산에 오른다. 찜질방이나 온천에서 억지로 내는 땀 말고 ‘건설적인’ 땀이 흘리고 싶어서다. 근 3~4년 만의 산행이다.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중간에 내려오고 싶어질 때는 양희은의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을 연속 들을 참이다.

가방에 좋아하는 귤과 초콜릿, 물, 오징어도 한 마리 넣는다. 엠피쓰리도 빵빵하게 충전시킨다. 곡들도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좀 튀는 듯하지만 화사한 등산복도 꺼내 입고, 등산화 끈도 꽉 조였다. 준비 완료다. 마지막으로 외친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고흥 팔영산, 8개 봉우리 굽이굽이 ‘뿌듯함’이!
발 아래 굽어보이는 고흥 바다와 섬도 절경


고흥반도.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고흥반도 동쪽으로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산마루에 공룡 알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 봉우리들의 그림자가 전국에 드리울 정도로 넓다고 해서 팔영산(八影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흥읍에서 25㎞ 거리. 높이 608.6m. 앞바다에 펼쳐진 다도해 국립공원 섬들과의 어울림이 장관이다.

팔영산은 맑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 제주도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여덟 개 봉우리를 북쪽부터 아래쪽으로 1봉·2봉 순으로 불렀다.

그러나 1998년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고흥군은 문헌을 뒤져 유영봉·성주봉·생황봉·사자봉·오로봉·두류봉·칠성봉·적취봉이란 옛 이름을 되찾았다.

팔영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변화무쌍해 산행의 맛이 남다르다. 위험한 곳엔 철 계단과 쇠줄이 설치돼 있어 안심이지만, 초보자나 어린이는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겠다 싶다. 주로 활용되는 등산로는 3곳. 왕복 4~5시간이 걸린다.
■ 능가사 ~ 8봉우리 종주 ~ 능가사 코스 일반적
종주를 하려면 산 서쪽 자락 능가사 입구에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이다. 절 왼쪽의 대나무숲~야영장~팔영산장을 거쳐 30분 걸으면 흔들바위가 나타난다. 여기서 10분 정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1봉이 나온다. 8봉까지는 2시간가량.

봉우리 아래에 우회로가 나 있으므로 굳이 바위봉우리를 탈 필요는 없다. 정상인 깃대봉을 내려온 후 남쪽 상사리 중앙초등학교로 내려오는 길이 종주 코스다.

그리고 깃대봉을 오른 후 다시 서쪽 산 중턱인 탑재를 거쳐 능가사로 되돌아오는 길과 동쪽 휴양림에서 1~2봉 사이로 올라 8봉과 깃대봉을 오른 후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길이 일주 코스.

팔영산은 오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주 등산로에 있는 사찰 능가사. 원래 이 절은 신라 눌지왕 때(419년)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송광사·화엄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전라도 대사찰 중 한 곳이다. 보현사로 불려오다 임시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인조 때(1644년) 다시 지은 후 ‘능가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화재인 능가사 범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헌병이 탐을 내어 고흥읍 내 헌병대로 가져갔다가 되돌려놨다는 기록이 있다.
■ 여덟 봉우리와 능가사의 어울림 ‘장관’
등산화 끈을 짱짱하게 묶고 걸음을 내딛는다. 산행의 초입은 편하다. 산사로 들어가는 길 은 오솔길을 걷듯 평화롭다.

능가사로 들어서니 넓은 마당이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짱짱하게 자리한 대웅전 너머로 절경이 펼쳐진다.

대웅전 처마를 비켜서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가 근위병마냥 서있다.
해 짧은 겨울 산행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옆문으로 나와 산길을 재촉한다. 산 속은 보름 전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곳이 눈에 띈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벌써부터 힘이 든다. ‘힘들다 생각 말고 물소리를 듣자, 나무 냄새도 맡자’ 속으로 다짐하며 한발한발 걸음을 옮긴다. 한 30여분쯤 걷자 흔들바위가 나타난다. 잠시 다리 쉼이다. 동네 뒷산을 올라본지도 몇 년. 다리가 금세 팍팍해진다.
더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1봉인 유영봉으로 길을 잡는다. ‘노약자ㆍ어린이 우회’라는 푯말이 보인다. 살짝 망설이다 무모한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바위 암벽이 턱 가로막는다. 등산객들이 ‘우회’한 까닭을 알겠다. 산길은 바위절벽으로 되어있다. 군데군데 쇠줄을 걸었고, 발판과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쇠줄을 잡고 바위를 오른다.

하지만 힘들어도 쉴 수 없다. 뒤를 돌아보면 밀착해서 오르는 수많은 등산객이 보이기 때문. 그 등산객들이 힘이 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봉우리를 오르면 오를수록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한참을 바위와 씨름을 하다 1봉 정상에 선다.
“와, 좋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고 점점이 작은 섬들이 아름답다.
처음에 이 많은 봉우리를 언제 다 넘나 싶다. 하지만 봉우리 하나하나가 묘한 정복감을 준다. 줄줄이 사탕처럼 엮인 남 모르는 등산객들도 힘이 된다.

봉우리 정상은 바람이 거세다. 오는 길 흘린 땀이 눈 깜짝할 새 식는다. 그 기분이 참 상쾌하다.
그렇게 2봉을 넘고, 3봉을 넘어 하나하나 야금야금 봉우리를 넘는다. 6봉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봉우리 이름도 두류봉.

안내판에는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길 어드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고 쓰였다. 천국으로 드는 문. 기분이 괜히 좋아진다.

휩쓸리듯 오르다 보니 어느새 8봉을 다 올랐다. 귤이며 초콜릿이며 수건이며 김밥이며 잔뜩 불룩했던 가방도 어느새 홀쭉해졌다. 마지막 봉우리 정상인 깃대봉에 선다. 몸이 휘청할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겁이 와락 나, 자리에 앉는다. 안개에 어슴프레 가려진 고흥반도의 바다와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처음, ‘산에 언제 가, 가기 싫다’했던 마음은 어느새 까맣게 사라지고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제 다시 능가사 길로 내려가면 된다. 3.2킬로미터 길. 산 아래서 시원한 막걸리를 맛보리라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한다. 헌데 산행은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어렵다 했던가. 발끝만 쳐다보며 걷는 길이 힘들다.

오르는 길 바쁜 마음에 듣지 못했던 엠피쓰리를 꺼내 이어폰을 꼽는다. 신나는 댄스곡 조용한 피아노 곡, 음악에 따라 발걸음의 속도가 달라진다. 한결 걸음이 가볍다. 음악의 힘이다. 막걸리의 힘인가?

어느덧 능가사 마당에 다다랐다. 온천에서 빼는 땀보다 산행으로 흘리는 땀이 더 값지고 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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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승용차로 보성 벌교까지 온 후 고흥 방면으로 공용국도를 타고 1.5㎞ 정도 내려가면 855번 국도를 만난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능가사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순천에서 떠나는 버스를 탄 후 과역에서 내리면 능가사로 가는 버스가 있다. 15분 거리로 하루 8회 다닌다.

<더 보기>
산 남쪽 상사리에 자리한 남포미술관은 명소다. 전국 유명화가들의 전시회가 연중 열리고, 음악회·연극 등의 공연도 잦다.

청정 바닷가에 생굴·매생이·미역 등 해산물이 풍성하다. 특히 산후조리에 좋다는 빨간 빛깔의 피문어가 많이 난다.

팔영산자연휴양림 아래 우천리 해안은 용바위·촛대바위·거북바위 등 볼거리가 많은 천연해수욕장이다. 주변이 온통 낚시터다. 10여분 거리인 상사리~남열리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팔영산 | 전남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 산 350-1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