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태초의 생명을 간직한 그곳

태초의 생명을 간직한 그곳

by 운영자 2010.02.05

1억4000만년의 역사, 경남 창녕 우포늪

환경에, 지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부끄럽게도 최근이다.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다. 그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예쁜 산과 들과 바다와 하늘과 강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면?’ 생각이 들었고 문득 겁이 났다.

멀리 북극곰이 살 곳이 좁아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섬 몰디브가 가라앉는다는 너무도 먼 얘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곳, 대한민국, 순천, 이곳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면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도 나무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의 삶은 싫었다.

그래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최대한 많이, 느리게, 건강한 방법으로 우리나라 곳곳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닐 것. 둘째는 불편을 감수할 것.

환경을 위한 다짐 중 첫 번째 것을 실행한다. 지난 2일은 세계습지의날이었다. 1억4000만년 전의 습지 생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경남 창녕 우포늪, 그곳의 아름다움을 새기고 올 참이다.

이른 새벽 우포늪 은밀한 생명의 소리를 듣다

토요일. 평소라면 한잠 늘어지게 자고 해가 중천에나 떠야 일어날 테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우포늪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해야 우포늪의 만 가지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사위가 깜깜한 새벽, 차의 시동을 건다. 자가용 대신 버스를 이용한 착하고 건강한 여행을 마음먹었지만 창녕까지 가는 버스편이 그리 좋지 않아 약속을 어겼다. 대신 규정 속도를 지키고, 불필요한 짐을 빼는 등 최대한 ‘착한’ 운전에 나선다.

고속도로에 차들이 뜸하다. 차츰 사위가 밝아지는 모습도 기분 좋다. 푸르스름한 빛이 내리쬔다. 꿈결 같은 물안개도 흩뿌려졌다.

우포늪 주차장에 차를 둔다. 여기까지만 차를 가지고 갈 수 있다. 나머지는 걸어야 한다.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어 자전거로도 우포늪을 둘러볼 수 있다.
■ 생명들의 자궁, 우포늪

경남 창녕의 우포늪은 1997년 생태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1998년에는 국제습지조약에서 보존습지로 지정했다. 또한 지난 2008년 이곳에서 람사르 총회가 열리면서 한반도에 있는 생태계의 보물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늪. 분명히 늪이라고 했다.

자, 늪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늪이라면 질척하고 그래서 한번 발을 디디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곳이다. 한마디로 불쾌한 곳. 헌데 우포늪은 그런 늪이 아니다. 그저 너른 호수 같다.

우포늪은 넓다. 231.4㏊(69만9985평). 창녕 대합면과 이방면, 유어면 일대에 펼쳐져 있다. 늪과 호수는 수심으로 분류된다. 깊이가 5m 이상이면 호수다. 늪은 보통 수심이 2m 이하다. 우포늪은 그래서 늪이다. 수심이 낮아서.

우포늪의 역사를 아는가.
우포늪 주변엔 고목 한 그루 없지만 이곳은 이미 1억4000만년 전에 탄생했다. 이 지역을 흐르던 강줄기가 움푹 내려앉아 늪이 됐다.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태어난 것은 4만~5만년 전에 불과하다

최초의 인류라고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나온 것은 겨우 300만년 전이다. 우포늪은 사람이 태어난 것보다 훨씬 전 탄생했다. 태초 온갖 생명의 생과 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우포 주변에는 50여개의 크고 작은 늪이 있었는데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일제 때는 일본인들이 논밭을 늘리겠다고 우포 귀퉁이에 둑방을 만들어 늪 한 조각이 날아갔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습지 한쪽에서 논밭을 부쳐먹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갈아엎고 ‘개발’해야 했던 당시엔 1억년이 넘은 늪이 얼마나 귀중한지 몰랐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자랐고 자라고 있고 자랄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우포늪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기대어 산다. 봄물이 막 오르기 시작한 수양버들이 새순을 냈다. 봄이 오면 물풀들이 여기저기서 초록 고개를 내밀 게 분명하다. 부들, 창포, 갈대, 줄, 물방개, 붕어마름, 벗풀….

이런 물풀은 생명 고리의 밑바탕이다. 그 틈에 붕어가 살고, 개구리가 연잎 위에서 햇살을 즐기고, 붕어는 늪의 어느 귀퉁이에 알을 낳을 것이다.

우포늪에는 수생식물 34종, 수서곤충 35종, 조류 350종 이상이 살고 있다. 이것들이 전부가 아니다. 먹이사슬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도 우포늪에 기대 산다. 우포늪에서 고기를 잡는다.
가랑비가 내리는 우포늪의 새벽. 노란 우비를 입은 어부가 배를 흔든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퍼져나간다. 물이 일렁이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평소라면 들리지 않았을 이 작은 소리가 우포늪에서는 너무도 잘 들린다.

배를 흔들어대는 것은 잠자는 붕어를 깨우기 위해서다. 그렇게 깬 물고기는 ‘가래’라고 불리는 통발에 어김없이 걸린다. 손으로 통발 속을 뒤져 붕어를 잡아내는 것, 우포식 고기잡이다.
■ 천의 얼굴을 가진 우포늪 풍경

우포늪은 생태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많이 찾지만 사진작가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 물안개 자욱한 곳에 호올로 떠있는 배, 우리에게도 익숙한 우포늪의 사진이다.

물안개가 자욱한 우포늪의 동쪽, 대대제방의 직선 길은 안개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포늪은 신선하다. 온갖 생명들이 뿜어내는 산소와 이산화탄소는 사위를 맑게 한다.

게다가 툭 하고 트인 경치까지 더해지면 공기는 사이다보다 더 시원한 맛이 난다.
서서히 해가 뜬다. 소리로만 구별했던 사방의 소리들에 분간이 된다. 물가의 오리며 붕어들의 소리다.
이동네 사람들은 우포를 ‘소벌’이라 불렀다. 우포 북쪽에 있는 우항산(일명, 소목산)을 하늘에서 보면 마치 소의 목처럼 생겨서 소가 목을 내밀고 우포늪의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8km. 제1탐방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보니 한걸음 마다 곤충과 새들 그리고 식물의 경치가 다르게 느껴진다.

우포를 한눈에 바라보려면 전망대를 올라가는 것이 좋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계단 길로 약 100m를 올라가면 나무의 키를 훌쩍 넘긴 높이에서 우포를 바라볼 수 있다.

해가 조금 더 높이 떠오르자 멀리서 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풀벌레소리가 들리며 조금씩 파릇하게 변해간다. 이곳이 1억 4천만 년 전의 생태계 모습을 아직도 갖고 있단 얘기가 허투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풍경에 있었다.
■ 느리게 걷기 좋은 습지

소벌이라 불리는 우포, 나무벌 목포, 모래펄 사지포 그리고 쪽지벌까지 우포늪은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각기 다른 늪 마다 2~4km의 탐방로가 마련돼 있다. 게다가 주변엔 1000여종의 생명체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포의 길은 아기자기한 생명체와 호흡을 같이하며 걸을 수 있다.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생태관도 빼놓지 말 것. 우포늪의 사계와 동식물, 영상실 등이 마련돼 있어 생태체험과 학습에 도움을 준다.

습지의 기능은 참으로 다양하다. 수생식물, 어류, 조류를 비롯해 수많은 생명체의 서식처가 되고 이것은 그대로 인간이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자원이다.

또한 습지가 머금은 물은 홍수를 예방하고 지구 온난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게다가 차곡차곡 쌓인 생태계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 연구를 위한 훌륭한 교재가 된다. 람사르 협약이 아니더라도 이 땅의 습지를 지켜야하는 이유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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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길
아무래도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이 편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창녕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도보 3분 거리인 영신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유어 또는 적교 방면 버스를 타고 회룡에서 하차해 30분 정도 걸으면 우포늪 입구에 도착한다.

* 우포늪 일주코스
세진주차장→왼쪽 시계 방향→우포늪전망대(철새)→쪽지벌(공룡발자국, 해식동굴, 자운영군락)→목포늪(가시연군락)→우만마을→장재마을(왕버들군락)→소목마을→주재마을→사지포제방(물옥잠)→대대제방(갈대, 억새군락)→세진주차장. 4시간 소요

* 주변 볼거리
우포늪생태관(055-530-2690)은 우포늪에 가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제2의 경주’로 불리는 창녕에는 신라진흥왕척경비와 동3층석탑 등 국보급 문화재를 비롯해 하병수 가옥, 화왕산, 창녕박물관, 교동고분군, 석빙고,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창녕성씨고가, 만년교 등 역사문화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고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부곡온천도 둘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