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1400년 전 가야로 출발!

1400년 전 가야로 출발!

by 운영자 2010.05.14

경남 김해, 500여년의 가야 역사 속으로

김해는 1400여년 전 전기 가야시대를 이끌었던 금관가야의 중심 터. 하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또렷하지 않다.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합천) 등 6가야의 이름을 다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가야는 우리에게 ‘희미하다’. 그 흔한 건축물도 사원도 탑도 없다.

뿌리를 중시하던 우리들의 역사. 그 때문이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종종 우리가 어디 최씨인지, 시조는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등등 ‘뿌리’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본 적도, 볼 수도 없는 이들의 이야기였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신기해 재미나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여전히 생생하다.

경남 김해. 잘 알지 못 하고 심지어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곳은 분명 1400여년 전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던 금관가야의 발상지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520여년 간 찬란한 꽃을 피웠지만, 신라 중심의 역사에 가려져 지금은 어렴풋이 가야 문화의 흔적들만 남아 있다. 교과서 속 이야기 따라 김해로 길을 나선다. 가야 문화를 찾아 나선다.
“잘 모르던 가야 역사 ‘발걸음’ 따라 배워요”
경남 김해, 몸으로 체험하는 가야 역사

수로왕이 가락국의 시조라는 사실보다 대한민국 400만 김해 김씨의 시조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많을 것. 김해로의 나들이는 가야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 면에서 내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 가락국 시조 수로왕 잠들다 ‘수릉원’
김해시 서상동의 수로왕릉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했다. 꼭 답사나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까운 산책으로 나서기에도 손색이 없다.

입구인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서니 가락루(駕洛樓)라는 현판을 단 누각이 나오고, 그 아래를 지나가니 ‘납릉정문(納陵正門)’이라 쓰인 문이 바로 보인다.

그 문 너머에 커다란 봉분이 나지막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거대한 빗돌이 서 있고, 그 좌우에는 석상 둘씩이 마치 왕을 호위하듯 서있다. 수로왕과 가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

“하늘이 열린 다음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다. 다만 9간이 있었는데, 그들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통솔했다.

모두 100호에 7만5000명이었다.”는 소개가 있은 다음,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2~3백 명의 무리가 그곳에 모여드는 것으로 탄생의 장면은 시작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구지가(龜旨歌)>라는 노래가 나온다.

“하늘에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내려가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밀어라 / 내밀지 않으면 / 구워서 먹을 테다’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은 구지봉(龜旨峰)에서 발견된 알이었다. 구지봉은 왕릉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있다. 말 그대로 거북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꼭대기에서 금합에 싸인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황금색 알 여섯은 12일이 지나자 모두 어린이로 변했고 다시 10여 일이 지나자 풍채 당당한 사내가 되었다. 이들은 각기 여섯 가야국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은 그 가운데서 대가락(大駕洛)을 다스렸다.

가야의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구지봉은 현재 경상남도기념물 제58호로 지정돼 보전되고 있다.
수로왕릉의 입장료는 없다.
■ 한옥의 美에 날 선 마음 부드럽게 … 김해 한옥 체험관
지난 2006년 9월 개관한 김해의 ‘한옥체험관’은 가야문화 복원 사업의 하나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주거를 그대로 재현했다. 1200여평의 부지에 사랑채, 안채, 별채, 아래채, 바깥채, 행랑채, 사당 등 84칸집이다.

12자짜리 나무 13만6000재가 쓰였고 기와만도 5500장이 올라갔다. 한옥체험관 조태희 팀장은 “월 평균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관람객은 700명 정도이고 관람만 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1만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김해 한옥체험관은 한옥의 정취와 현대적인 편의시설을 잘 조화시켰다.
한옥체험관 입구에 들어서면 옛 가옥의 웅장한 나무 대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잘 다듬어진 흙담 안에 자리잡은 안채와 별채, 사랑채, 사당 등에는 제각각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특히 큰 현관과 안채와 사랑채 사이는 ‘교배식 문’으로 길을 텄다. 방안은 조선시대 때 양반들이 쓰던 소품을 그대로 꾸며놨다.

경상, 연상, 거북촛대, 쌍문갑, 서경대, 지통, 좌경, 백자항아리. LCD모니터와 전화기, 비데도 보인다. 옛 것을 재현하되, 현대의 편리함도 빼놓지 않았다. 조 팀장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옥체험관 주변에는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릉과 수로왕과 허황후의 숨결을 간직한 수릉원, 김해 민속박물관, 봉황대 등이 5분 거리에 있어 다양한 볼거리도 즐길 수 있다.
■ 별 볼 일 있는 밤 … 김해 천문대 김해 시내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치 산이 알을 품은 듯 정상에 들어선 건물이 김해천문대. 2002년 개관한 영남 지역 유일의 시민천문대다.

천문대 모양이 꼭 알을 닮았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다.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 출신의 공주. 당시만 해도 첨단 항해장비가 없었던 터라 허왕후가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올 때 별을 보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가락국의 왕자가 진례 토성 위 상봉에 천문을 보기 위해 첨성대를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그곳을 별을 보는 곳이라 해 비비단이라 부른다. 이처럼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금관가야는 ‘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입구에서부터 천문대 정상까지의 거리는 600여m. 천상으로 향하는 이 길은 산책로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은데 가로등은 없다.

별자리를 관측하는데 인공조명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나라 고대 별자리를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감상할 수 있고, 밤길을 밝혀주는 별자리판과 천체사진이 100m 간격으로 설치돼 길동무가 돼준다.

조선시대의 관측기구를 복원해 놓은 ‘혼천의’를 지나면 천문대다. 이곳은 크게 전시동과 관측동으로 나뉘고, 전시동에는 천체투영실과 전시실이 있다.

천체투영실은 지름 8m의 둥근 반구형 스크린에 밤하늘의 별들을 재현해주는 천체투영기라는 특별한 영사기가 비치돼 있다. 30여분 동안 계절별 별자리, 태양계 탐사 등 밤하늘의 별자리와 우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상물을 상영해 준다.

천체투영실에서 복도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알 모양의 전시실이다. 지름 20m의 철제구조물의 모양이 독특하다. 건물 안쪽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와 관측동.

전시동 내부에는 우리나라 천문관측의 역사를 입체영상으로 설명해 주는 매직비전, 중력실험장치, 푸코진자를 비롯해 10여개의 천문 교육 전시기구를 구비해 아이들의 과학놀이터인 셈.
전시동을 나오면 정면에 관측동이 있다. 관측동은 천문대 관람의 백미. 2대의 주 망원경이 설치된 제1관측실과 제2관측실, 그리고 6대의 작은 망원경이 설치된 보조 관측실로 구성돼 맑은 날 밤이면 언제든 별자리를 관람할 수 있다. 각 관측실에는 부산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에서 파견된 전문요원들이 별자리와 망원경에 대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이밖에도 가야뿐 아닌 문명이 채 발달하기도 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모습을 볼 수 있는 김해봉황동유적, 회현리 패총, 패총전시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 가야는 가락, 가라, 가량, 구야 등으로 불렸으며 삼국시대 동안 김해 등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는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가야의 철기 문화는 우수한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야는 2세기 경 김해부근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구성했으나 고구려의 침략으로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5세기 경 고령부근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을 결성했으나 신라와 백제의 압박을 받다가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