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세상의 소음 묻어버리는 ‘겨울바다’

세상의 소음 묻어버리는 ‘겨울바다’

by 운영자 2011.03.04


부안 변산반도

지난 겨울 무던히도 추웠다. 그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꽃샘추위가 ‘싸납을 내고’ 있지만 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서어서 가버렸으면 하고 바랐던 겨울이 간다니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는 ‘겨울’과 ‘바다’ 두 낱말이 합쳐진 낱말이지만 마치 원래 ‘겨울바다’ 한 몸이었던 것 같다. 겨울의 쓸쓸함을,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희망을 겨울바다만큼 잘 담아주는 것이 또 있을까.

겨울바다로 간다.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암벽과 그곳에 부딪혀 생기는 파랑. 더 멀리 잔잔한 수평선. 저 바다에 쓸쓸함 버리고 희망을 채운다.
겨울 바다, 겨울을 맘껏 즐기다
변산 마실길, 황홀한 풍경·파도소리·바다냄새


전북 부안은 서해안 끄트머리 변산반도를 끼고 있다. 변산반도는 ‘서해의 진주’. 의상봉(509m)을 주봉으로 칠산 앞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땅이다.

느림의 미학이 트렌드가 된 이즈음 ‘변산 마실길’을 걷는다. ‘마실’은 '마을에 나간다'는 뜻.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길’을 합쳐놓은 듯한 옛길이다.

유수한 세월 속에 잊혀지고 묻혔던 이 길이 최근 세상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은 후 동네 마실 가듯 허물없이 나선 길. 문득 만난 해송숲 솔향기에 흐트러진 마음이 가지런히 내려앉는다.

변산반도는 겉보기에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한적한 땅' 같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요모조모 볼거리가 알차다.

특히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이 자랑. 세계 최고의 고려청자는 물론 실학의 거목 반계 유형원이 이곳에서 반계수록을 집필했고 조선시대 천재 여류시인 이매창의 한과 사랑, 예술혼이 이 땅에 남아 있다.

■ 도란도란 걷는 변산 마실길
‘변산 마실길’은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18㎞ 거리. 새만금전시관에서 송포갑문까지 1코스, 송포갑문에서 성천갑문까지 2코스, 성천갑문에서 격포항까지 3코스로 나뉜다. 예전에 바다를 지키던 해안초소와 철조망길을 산책로로 개방해 지도상의 해안선이 곧 ‘변산 마실길’이다.

출발점은 새만금전시관. 송포갑문까지는 오른쪽으로 변산 앞바다를 끼고 간다. 쉴 틈 없이 다가오는 포구와 마을, 개펄 풍경이 정겹다. 더디게 느리게 걷다보면 파도소리, 바다냄새, 흙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1시간30분 거리의 1코스는 곤충해양생태원과 대항리 패총, 팔각정, 변산해수욕장을 거쳐 간다. 대항리 패총은 초소길을 따라가다 바닷길에 접어들어 고개 너머다.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류의 껍데기가 쌓인 무더기.

1967년 발견된 패총은 사방 10m 내외에 두께가 60㎝로 선사시대 유물이 함께 발견됐다. 여기서 변산해수욕장까지는 바닷길. 제법 운치가 있다.

송포갑문에서 시작하는 2코스는 사망마을을 거쳐 고사포원대수련원, 송림구간, 제7공수부대, 성천마을포구까지. 송포항을 떠나면 길은 호젓한 숲길을 지나 고사포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모래밭이나 바닷길을 제외하면 길은 대부분 해안초소길이다. 군경이 떠난 길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고사포해수욕장을 지나면 해안사구. 말 그대로 모래언덕이다. 때를 맞추면 한 달에 한 번 그믐날 하섬까지 바닷길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다.

2시간30분 거리의 3코스는 해안가를 따라 제법 볼거리가 늘어섰다. 성천·유동·반월마을을 지나면 적벽강, 수성당, 격포해수욕장, 채석강, 격포항 등 유명관광지가 줄줄이 이어진다.

적벽강은 중국의 소동파가 노닐던 적벽강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채석강 역시 중국의 시선 이백이 강물 속 달을 따려다 빠져죽은 채석강과 닮아 얻은 이름이다. 적벽강에서 채석강을 잇는 해안선은 변산반도의 백미.

적벽강은 이름 그대로 암반과 절벽이 붉은 때깔을 띠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30m 거리에 있는 용굴과 몽돌이 볼만하다. 적벽강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일반적으로 강으로 생각하거나 채석강의 유명세에 가려 묘미를 아는 이가 많지 않기 때문. 몽돌과 백사장으로 조성된 적벽해안은 여름철 피서지로 제격이고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일몰 또한 장관이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수호신 ‘개양할머니’를 모신 수성당을 둘러보고 격포해수욕장과 채석강으로 간다.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 격포항은 한 몸처럼 얽혀 있다. 격포해수욕장은 채석강을 끼고 있어 ‘채석강해수욕장’으로도 불린다. 채석강은 닭 이봉 아랫도리를 감아 도는 모양의 해안 단층이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 참된 나를 찾는 곳, 불사의방장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 불사의방장(不思義方丈)은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 동쪽에 있는 절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한 수행처이자 종교적 성지다. 불사의방장은 ‘세상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뜻.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고승인 진표율사가 거처하며 미륵신앙을 잉태한 곳으로 원효, 의상, 부설거사, 진묵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고승들이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고행 장소인 셈이다.
변산을 ‘능가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험해서 오르기 어려운 산이란 뜻. 이 능가산 천길 벼랑에 자리잡고 있는 불사의방장은 ‘세상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눈’으로도 찾기 어려운 곳이다.

가는 길도 험하다. 의상사 터에서 의상봉 쪽으로 올라가다 확 트인 벼랑 끝에서 밧줄을 타고 10m 정도 내려간다. 뒤쪽은 바위벽이고 앞쪽은 현기증이 날 정도의 까마득한 벼랑으로 진표율사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다람쥐절터’로 불렸다.

이규보의 글에는 ‘바람이 불어도 집이 쓰러지지 않도록 바다의 용이 절벽에 쇠말뚝을 박아 매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집은 사라졌지만 절벽에는 쇠말뚝 끝이 아직도 박혀 있다.

천년 전 그 누가 이 말뚝을 험준한 이곳에 박았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은 특히 전국에서 ‘기(氣)’가 가장 센 곳으로 알려져 이를 시험해보기 위해 전국에서 찾는 이가 적지 않다.
■ 자연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움, 내소사
변산반도의 부안. 때문에 부안을 바다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변산은 내변산과 외변산으로 나뉘는데 외변산은 바다가, 내변산은 산이 자리하고 있다.

내변산 관음봉 자락에 오롯이 자리한 내소사는 절 그 자체 말고도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 바로 그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걷는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에 들어서면 가슴이 툭 트이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흙길 양옆으로 병정처럼 꼿꼿하게 심어진 전나무 때문이다.

길을 빠져나오면 낮은 담장과 이어진 사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면 왼편에 범종각이 보인다. 송수권 시인이 ‘내소사의 종소리에도 젓갈 냄새가 자욱하다’고 했던 범종각이다.

그 앞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수령 1000년의 당산나무와 수령 300년의 보리수다.

나무들을 지나면 만나는 것이 봉래루다. 봉래루는 대웅보전 바로 앞에 있어 대웅보전으로 가는 문이 되기도 하고, 이름처럼 누각이 되기도 한다. 1인 2역을 하고 있는 셈.

대웅보전으로 통하는 봉래루의 다리는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높이지만 예전에는 이보다 50cm 정도 낮았다고 한다. 불교가 탄압을 받을 때, 양반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들어와 예불을 올렸는데 이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봉래루 아래로 들어가 몇 계단 오르면 보이는 것이 대웅보전. 능가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선 대웅보전은 다른 절과 다르다.

가장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색. 내소사 대웅보전의 단청은 색이 없다.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 오방색을 칠하지 않고 나뭇결 그대로 드러났다. 소박하고 그래서 정겹다.

무채색 단청뿐만 아니라 꽃창살에도 색이 없다. 화려한 꽃마저도 소탈해진다. 대웅보전이 다른 곳과 다른 또 한 가지는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을 끼워 맞춰 지은 것이라는 것.

흙길과 향 짙은 전나무들이 만든 터널, 색을 입히지 않은 단청과 꽃살문, 못을 쓰지 않고 짜맞춘 건축. 능가산 자락이 품은 내소사는 그래서 더 자연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