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다산의 흔적을 따라 가다

다산의 흔적을 따라 가다

by 운영자 2012.10.19

강진 사의재~보은산방~다산초당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후략)> 정호승 - 다산주막 -
▲ 사진설명 : 사의재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 읽다, 도저히 궁금해 못 견디겠기에 곧장 집을 나섰다. 책을 읽다, 책 속의 그곳이 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선 길이 강진의 ‘사의재(四宜齋)’.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생활 중 첫 거처인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강진에 가면 다산 실학의 4대 성지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 강진 유배 생활 18년중 낯설고 물 선 땅 강진에서 처음으로 머문 곳은 다산초당이 아닌 동문 밖 주막 ‘사의재’였다.

이곳에서 4년을 지낸 정약용은 이후 9개월을 절집인 보은산방에서, 다시 2년을 제자인 이학래의 집에서 보내며 귀향 생활을 했다. 마지막 거처가 잘 알려진 다산초당.

사의재에서 다산초당까지 다산의 자취를 따라 간다. 경기 남양주 출신의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1801년 39세 때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강진 유배생활 10년 동안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작 600여권을 썼다.

그의 첫 거처인 강진읍성 동문 밖 주막집 바깥채 사의재((四宜齋)는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당했을 당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때 한 주막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대표적인 저서인 경세유표를 저술했고 관아 벼슬아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해 다산의 첫 번째 유적지인 다산초당에 못지않은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사진설명 : 다산초당

이곳이 대선을 2달여 남겨두고 있는 지금 더 의미 있는 것은 ‘생각·용모·언어·동작이 올바른 이가 사는 집’이라는 사의재((四宜齋)의 뜻 때문이다. 또 탐관오리들에게 핍박받는 민초들을 직접 목격하며 한탄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사의재에서는 또 하나 정약용 선생의 반전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이곳 사의재에 머무르며 주막집에서 일하던 표씨 부인과 인연을 맺고 홍림이라는 딸까지 낳았다.

대쪽처럼 꼿꼿하기만 할 것 같은 그에게도 나름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 선생의 러브스토리는 사의재 안 주막을 운영하는 문화유산해설사들로부터 들을 수 있다.

주막에서는 그 옛날처럼 파전·동동주 등을 파는 토속음식점이 차려져 있다. 다만, 간혹 개인적인 사정으로 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있으니 미리 연락을 하고 가면 더 좋다.

<우두봉 아래 작은 선방에는 대나무만 쓸쓸하게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 밑 절벽에 부딪히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 있네. 둥그런 나물 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 정약용 ‘제보은산방’ -

다산은 백련사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를 만난다. 혜장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주막에 정약용이 머물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고성사 내 칠성각으로 옮기게 한다. 정약용은 혜장의 그 마음을 고맙게 여겨 보은(寶恩)산방이라 이름을 지었다.

허나 지금의 고성사에는 보은산방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 보은산방임을 알리는 표지판만 있을 뿐이다.
그는 다시 이곳을 나와 제자인 이학래 집을 거쳐 다산초당에 머물렀다. 정약용이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을 했던 이곳은 원래는 초가여서 ‘초당’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일제 때 붕괴된 후, 50년대 후반 목조기와로 복원됐다. 현판 글씨는 추사체를 모아 판각했다.
▲ 사진설명 : 보은산방이 있었던 자리

초당 옆에는 집필실로 썼던 동암(東菴), ‘18제자’ 등 문하생들이 밤새워 토론하던 공간 서암(西庵)이 있다. 초당 서쪽 뒤편에는 그가 직접 바위에 쓴 ‘丁石’(정석)이 남아 있다.

동암에서 조금 오르면 천일각이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마음을 달래던 곳이라고 한다. 백꽃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백련사는 다산초당과 가깝다. 정약용도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까지 오솔길을 걸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牧民)을 생각했고 한다.

사의재부터 다산초당까지 정약용의 유배지를 걸으며 자취를 살폈다. 책으로 읽던 것은 직접 보며 더 선명해졌고, 그간 복잡했던 마음도 정리됐다. 그러고 보면 걷기는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을 깨우쳐 주는 사색의 방법인 모양이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 cmh963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