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구례 천은사

구례 천은사

by 운영자 2013.11.22

번잡한 마음까지 ‘숨어버리는’
▲천은사 수홍루에 비친 계절

“순천만 정말 좋더라. 용산에 올라서 순천만을 보니 ‘와!’ 진짜 멋지던데. 나도 순천 와서 살까?”

며칠 전 걸려온 친구의 전화. 내용인 즉, 남편과 싸우고 혼자 차를 몰아 순천만에 올랐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 절경에 남편에게 서운한 것 까지 까맣게 잊게 되더라며 순천에 와서 살고 싶다 너스레를 떤다.

고백컨대 순천에 3년 넘게 살고 있지만 순천만을 가본 횟수가 열손가락에 꼽는다.

그것도 멀리서 부모님이 오셨을 때 한번, 친구 모임에서 한번, 은사님과의 답사에서 한번 이 3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 때문에 ‘가야만’ 하는 것이라서였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깨달았다.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 것의 귀함을 잊고 사는지.

내친 김에 주말 동안 인근을 쏘다녔다. 토요일에는 순천만에 다녀왔고, 일요일에는 구례 천은사에 다녀왔다.

일에서 놓이고, 동행하는 이들의 눈치 없이 편히 오르는 순천만은 누구의 발걸음에도 얽매이지 않고, 누구의 말소리도 귀에 거슬림 없이 여유로웠다.

그래서인지 갈대들의 움직임이 더 눈에 잘 들어오고 바람소리도 가깝게 느껴졌다. 순천만의 아름다움은 굳이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듯.

10년도 전에 한번, 그것도 지리산 오르는 길에 잠깐 들러본 천은사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다.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고찰 중 하나
▲천은사 일주문

지리산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천은사는 절에 오르는 입장료를 내고서도 ‘못 보고 그냥 지나쳤나’ 생각이 들만큼 한참을 올라야 닿을 수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덕운 스님과 인도 승려 스루 선사가 세운 천은사는 고려 충렬왕 때 ‘남방제일선원’으로 지정된 천년고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35호,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화엄사의 말사인 천은사는 화엄사와 하동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 중 하나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뒤 몇 번의 화재와 중건을 거친 뒤 영조 51년(1775년) 혜암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 이름은 감로사(甘露寺)로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고 해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1000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 이름을 바꿨다.

경내 편액 글씨 눈여겨 볼 것
▲천은사 경내

일주문을 앞에 두고 왼쪽에는 부도밭이 있다. 소나무숲에 가려 지나치기 쉽지만, 초겨울의 소나무숲과 부도의 조화가 스산한 듯 멋지다.

일주문도 그냥 지나치지 말 것. 특히 일주문의 현판에 주의를 기울이자.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 글씨가 석자씩 세로 두 줄로 씌어 있는데, 이는 조선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글씨를 더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현판을 쓰게 된 배경 때문이다.

천은사는 중건 이후 이름을 바꾼 뒤 원인 모를 화재가 잦았고, 갖은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를 절의 기운을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도 하고, 그 글씨가 마치 지리산 속에 부는 바람 같기도 하다고 전한다.

천은사의 일주문은 절의 귀중한 내력을 담고 있는 셈인 것이다.

일주문에 들어서 우측 산비탈에 숨어 있는 이끼폭포도 지나치지 말 것. 춥고 앙상한 요즈음에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한여름 초록 이끼를 두른 바위 사이로 물이 쏟아지는 모양새가 꽤 멋스럽다.

수홍루서 보는 사계절 표정‘황홀’부도밭을 감싼 소나무숲을 지나면 수홍루(垂虹樓)가 보인다.

수홍루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무지개다리 위에 세워진 2층짜리 누각. 자태가 번듯한 누각은 천은사계곡과 저수지 사이에 놓여 운치 있다.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진 계곡에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주변의 나무들이 호수까지 붉게 물들이는 절경을 선물한다.

다리에 올라 누각을 머리에 두고 계곡과 저수지를 번갈아 본다. 눈에 비친 수홍루와 물에 비친 수홍루가 하나같이 아름답다. 천은사가 샘을 감춘 절이라 했던가. 이곳에 서면 번잡한 마음까지 감춰질 것 같다.

다리를 건너 절에 든다.

천은사는 당우마다 걸린 명필 편액이 유명하다.

일주문을 쓴 원교 이광사를 비롯해 창암 이삼만, 성당 김돈희, 추사 김정희, 염재 송태회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남긴 필적은 보물이다.

천은사에 왔다면 각기 다른 현판의 글씨체를 잊지 말고 감상할 것.

경내에는 2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법당인 극락보전(전남유형문화재 50)은 다포 양식을 갖춘 화려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또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보물 924)는 18세기 한국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천은사를 나와 남원으로 향하는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성삼재(해발 1102m)에 오를 수 있다. 내친 김에 지리산에 더 오르고 싶다면 노고단 정상 길상봉(1507m)을 권한다. 성삼재휴게소에서 50분 거리.

자갈길과 시멘트포장길, 나무계단, 돌계단을 번갈아 타고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폭이 넓어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 친구인 듯 곁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노고단 정상 부근까지 이어진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초겨울의 하늘이 눈이 닿는 저 멀리까지 무한데로 펼쳐진다.

[교차로신문사/ 최명희 기자 cmh@sgs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