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축제

너른 어머니 품 같은, 백련사 숲

너른 어머니 품 같은, 백련사 숲

by 운영자 2015.07.17

오솔길 따라가니 다산이 기다리네
강진 땅을 밟았다면 누구나 가보았을 곳. 천년 고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오솔길에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묵묵히 세상을 지켜온 숲이 있다.

옛 다산기념관에 있는 두충나무숲에 가면 누구나 예술작품이 된다.

백련사 동백나무숲
강진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는 소박하다. 가진 것이라곤 돌계단과 갯벌 가득한 강진만 풍경이 전부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강진에서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다산은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함과 비통한 마음을 삭이며 이곳 초당에서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썼다.

다산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거웠다.

백련사 오른쪽으로 난 숲길로 들어섰다. 아침나절인데도 어둑어둑했다. 몇 발자국이나 내려갔을까. 추운 날 보아야 제맛이라는 수백년 된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은 11월에 피어 이듬해 4월 붉은 꽃잎을 후드득 미련 없이 떨군다. 겨울 꽃잎을 피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한여름의 헐벗은 동백나무.

강진군 윤동옥 문화관광해설사(58)는 “전국에 동백숲은 많지만 두 발로 직접 들어와 만져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며 “이곳에서 400~500년 된 나무를 보면 평생 마음속에 동백꽃이 핀다”고 말했다.

숲은 온갖 시름을 내려놓은 듯했다. 자식을 위해 기꺼이 헐벗은 어머니의 품이 이런 것일까.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800m에 이르는 숲은 소통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은 오솔길을 오가며 철학과 사상을 나누었다. 다산은 실학을, 혜장은 불교를 깊게 성찰했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다산은 두 사람의 우정을 시로 남겼다.

다산수련원 두충나무숲30분 정도 걸었을까.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해월루와 천일각을 지나자 다산초당이 반겼다. 책 속에 파묻혀 밤새 호롱불을 밝혔을 다산의 거처 송풍암 툇마루에 앉았다.

앞을 보니 소나무, 동백나무, 삼나무 등이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평지로 내려오는 길은 꽤나 힘들었다. 돌계단과 자갈밭은 조심스러웠고, 쇠심줄처럼 툭툭 튀어나온 나무뿌리는 미끄러웠다.

세상과 억지로 끊어야 하는 인연이 이토록 고달픈 것이었으리라. 단 한 걸음도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은 유배지였다.

옛 다산기념관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산수련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두충나무숲을 만나기 위해서다.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두충나무 2260여 그루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10m가 넘는 제법 큰 키에 갈색 옷을 입고 옆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10년 전 공무원을 위한 다산수련원이 들어서기 전부터 숲이 있었다고 했다.

숲은 둘이 걷기에 비좁았다. 혼자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이 예술작품으로 변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김주례씨(62)는 “다산기념관이 확장 이전되기 전에는 이곳을 거쳐야만 초당으로 갈 수 있었다”면서 “색다른 풍경이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백련사는
해발 408m의 만덕산 자락에 있는 백련사는 839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236년 불교정화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해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1430년 효령대군이 동생인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했다. 조선시대 만덕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백련사로 부른다. 보물로는 백련사 사적비가 남아 있고 절 앞에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푸조나무와 함께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숲 등이 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번지.